가. 들어가면서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채식주의자」를 읽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 만큼 이 소설은 다의적으로 해석할 여지와 공간과 길을 열어 놓은, 저 멀리 커다란 산의 꼭대기가 보이는 광야 같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정작 소설에 대하여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질문은 같을지 모르나 답은 독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감각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질문의 주제는 ‘폭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응하는 작가의 생각이었습니다.
나. 폭력의 근원
작가는 폭력의 원인을 여러가지로 파악하는 듯합니다.
1. 본능
폭력은 본능에서 출발합니다. 개가 사람을 무는 행동,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요된 섹스, 형부의 처제에 대한 준강간 등 폭력은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일어납니다.
2. 이데올로기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 일곱을…』(38면)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자신의 이념에 반하는 자들은 모두 악(惡)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폭력으로 제거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폭력은 정의로 포장됩니다.
3. 사회적 규범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의 뺨을 때리고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그것이 훈육이란 이름으로 상습적으로 이루어진 폭력입니다.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보호막에서 말입니다.
아버지는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잔인한 수법으로 도살합니다. 주인집 딸을 물어뜯은 개를 처벌한다는 정당한 구실 하에 폭력이 자행됩니다(가해자가 다른 가해자를 폭력을 통하여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4. 예술
예술은 심미(審美)를 탐구하는 인간의 감성적 문화활동입니다.
「몽고반점」에서는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형부가 바디페인팅을 비디오에 담는 작업을 하면서 처제의 몸을 탐닉하는 폭행이 벌어집니다.
섹스를 강요하고 예술이란 명목 하에 교묘히 폭력이 용인됩니다.
다. 폭력에 대한 태도
1. 작가는 폭력을 결코‘용서하지 않’습니다.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52면)
아홉살의 영혜가 자신의 다리를 물은 자기 집 개가 아버지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어갈 때도 영혜는 끝까지 그 개를 용서하지 않습니다(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스라치게 놀랐고 또한 서슬이 퍼런 작가의 섬찟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폭력에 대한 이런 분노는 정신병원에서 영혜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의료진의 튜브 시술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210-213면). 아무리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행위일지라도 작가는 폭력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2. 작가는 폭력을 ‘기억’합니다.
『손이 거칠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뺨을 맞던』(158면), 어린 시절부터『열여덟살까지 종아리를 맞고 자랐고』(38면),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191면).
영혜는 성인이 되어서도 폭력을 기억하고 자신이 분노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혜는 끝까지 폭력을 잊지 않았습니다.
라. 폭력에 대한 저항 방식
1. 작가는 철저히 비폭력적입니다.
작가가 폭력에 분노하는 까닭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할 때에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폭력에 그 자체에 대한 증오때문입니다. 인간은 미워하는 것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손도, 발도, 이발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43면) 믿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43면).
2. 불가피한 폭력마저도 자신에게로
그러나, 아무리 폭력을 피하려 해도 이 세상은 끊임없이 폭력을 가합니다, 그것은 훈육 또는 교육(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폭력), 정의 또는 처벌(아버지가 주인을 문 개를 죽이는 장면), 생명의 연장 또는 인류애(병원의 생명연장 시술)에서 시작하여 본능(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요된 섹스 또는 처제에 대한 준강간), 이념(베트콩의 살해) 또는 예술(비디어영상 촬영을 통한 섹스)이란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온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하고, 모든 것이 폭력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목적이기도 한 세상에서 기댈 곳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폭력에 저항하려 해도, 최악의 순간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필연적으로 저항의 몸부림은 불가피하게 폭력적이 됩니다.
하지만, 그 폭력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51면).
작가는 폭력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폭력을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향하는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죽음마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아닐까요?
『……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191면)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잘 맞추어 살던 인혜가 삶에 절망하여 심야와 새벽의 어느 시점에 헤맬 때 인생은 그녀의 절망과 포기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 줄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205-206면)
즉, 삶 자체가 무자비하고 무서울 만큼 서늘한 것이지요.
이를 깨달은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와 엄마 새의 꿈을 꾼 지우를 자신의 품안(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218면).
그러기에 『그냥 꿈』(219면)일지도 모를 삶을 살아갈 용기와 결기(決起)를 얻습니다.
마. 마무리하면서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을 아직 읽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설이 보여주는 주제의식(질문)에서 이미 폭력의 의미에 대하여 천착하고. 향후 5.18. 이나 4.3. 이란 날짜로 기억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얼룩지게 만든 조직적이고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탐구하는 단초를 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영어 속담이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행사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이제 저는 그 동안 이런 저런 명목으로 타인에게 이런 저런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정말 비폭력적으로, 폭력 없이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맹렬히 고민하려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단순히 죽음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가 목적이고 가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던진 질문의 답이 아닐까요?
아침마다 계란 2개를 후라이 해 먹고, 가끔 가족들과 삼결살을 구워 먹는 제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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