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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정
- 중앙대 교육학과 졸업
- 2000년 도미
- 둘루스 거주
-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남쪽으로 가는 기차

keyjohn2021.12.29 16:48조회 수 59추천 수 1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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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들이 잦아드는 밤이 되면

뉴욕을 떠나 뉴올리언즈까지 가는 암트랙 기차소리가 들린다.


건널목 근처에서 울리는 기적소리는 기차에 대한 기억들을 불러온다.

송창식 '고래사냥' 속 삼등 완행열차가 불확실한 미래와 방황 사이의 젊은이들을 위한 기차라면,

조수미의 '기차는 8시에 떠난다' 속 카테리나행 기차는 나찌에 저항하는 연인을 떠나 보내는 비통의 기적이 울리는 기차일 것 같다.

미국생활 21년만에 여객기차 대신 풍경기차(scenic train)여행을 했다.

가을 단풍철 예약을 놓쳐 아쉬움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환호와 시선에서 소외된 앙상한 나무들을 위로하러 갔다 되레 위로를 받고 온 기분이 들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의 기차는 궂은 비 속에서 출발했다.

북부 조지아 블루리지에서 출발해 국유림을 끼고 토코아강을 감고 달리는 기차는,

왕복 두시간 동안 나름의 일정으로 승객들을 즐겁게 했다.

사진을 찍어 원하는 승객에게 팔고, 스낵칸에서는 블루베리빵과 음료도 팔았다.

칸마다 한명 씩 배치된 가이드가 기차가 지나는 곳의 유래와 특징을 설명하고, 기차칸을 돌며 존 댄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부르던 초로의 컨츄리 송 가수 부부의 노래도 여운이 남았다.


의자를 마주보게 배치한 기차는

용산역을 떠나 남으로 달리던 내 소년시절의 완행열차를 닮아 있었다.

외가 평택을 가기 위해 어머니와 나는 가까운 서울역보다는 용산역에서 기차를 탔다. 

값싼 완행열차는 용산역에서만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차를 타러 가기 전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작은 신경전이 있었다.

어머니는 기차 안에서 지출을 줄이려 나에게 간식을 먹이려 했지만,

나는 기차 타기 전 짧고 계산된 금식을 하곤 했다.

그 금식 끝에는 기차안에서 파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 같은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계란을 먹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어머니 친구 금단이네 이야기가 단골로 등장했다.

저 쪽에 앉은 말쑥한 남자가 자꾸 우리를 쳐다 본다는 이야기 끝에는 벌떡 일어나 그 쪽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 청상이셨던 어머니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같은 것이 묻어있던,

낯선 남자와의 달콤한 눈싸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너끈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작은 눈을 부라리며 그 말쑥한 남자를 쏘아 보기도 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면 나도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쩌면 짙은  안경 낀 이는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황당한 나의 주장은 제2의 이승복이 되고 싶은 나의  반공 이데올로기의 반향이었던 것 같다.

미군부대 후문에서 숙박업을 하시는 할머니가 나를 위해 아껴놓은 미제 초코렛이랑  C ration에 대한 기대 섞인 이야기가 이어지고,

돌아가신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끝에는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어머니의 손수건이 바빠지기도 했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메텔을 따라 온 철이 처럼 멀리 와 있고,

내 어머니는 기차 난간같은 무거운 walker를 붙잡고, 아들 손 잡고 가던 친정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친정 식구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되고 낯선 이들이 살고 있는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친정을.


역병이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사람들의 왕래가 공기처럼 자유로운 어느 날!

십자가같은 walker를 미는 어머니를 앞세우고  용산역에서 남쪽으로 가는 기차여행을 꿈꿔 본다.




https://youtu.be/8ed3uTfoiUI


https://brscen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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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友 옆집 문둥이 (by key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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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북행 열차는 고향을 뒤로하는 기차,

    남행 열차는 고향를 향하는 기차였어요

    (한국에 있을 때) 

    '남쪽으로 가는 기차'  지난 날의

    설레임을 다시 일으키게 하네요.

    수십년 전의 추억의 세계를 다녀오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효심도 지극하십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늘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 keyjohn글쓴이
    2021.12.29 18:33 댓글추천 0비추천 0

    미국보다 기차여행에 익숙했던 한국에서 자란 영향인지

    기차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차여행은 손발의 자유 나아가 마음에도 자유와 여유를 주어서 더욱 좋습니다.

    아내와 같은 방향을 보는 자동차 여행과 달리

    마주보며 두시간을 소근거리노라면(옆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반강제 소근거림 ㅎㅎ) 말라가던 금슬이 조금 촉촉해 지더라구요.

    하루 여행으로 강추드리는 블루리지 풍경열차여행 입니다.


    존덴버 take me home country roads 가사 외워가시면

    합창할 수 있어서 더욱 즐겁답니다.

  • keyjohn님께

    정한 곳은 없어도 어디론가 훌쩍 기차를 타고 떠나고 싶어지네요.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했던 학창시절 챙피해서 한사코 싫다던 보따리에 

    이것 저것 싸들고 배웅 나오셨던 깡 마르신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설쳤습니다

    많은 추억을 불러오는 임선생님의 기차여행 속에 한참을 동승해 보았습니다


    8시 기차는 떠나고

    개인 적으로 조수미의 노래도 좋지만

    하리스 알렉시우의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들으니 더 좋았어요 

  • 이설윤님께
    keyjohn글쓴이
    2021.12.31 21:29 댓글추천 0비추천 0

    하리스는 그리스 가순가 봐요.

    너무 좋네요.

    제 나라 작곡가의 의도가 모국어에 제대로 안착한 듯 자연스러운 우수가 철철 넘치네요.

    기차에서 시작해 그리스 가수까지 초대하게 하는 글의 힘과  글로 맺어진 인연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촐한 제 기차 여행에 동승하심에 감사드립니다.

  • 20대중반 

    직장도 잃고 

    사랑도 잃고 

    백수가 되어 미땅히 갈곳이 없어

    창량리에서 중앙선 밤 열차(막차)를 타고 

    밤새도록 한 숨도 못자고 도착한 

    고향, 월촌리

    푸른 달빛이 마중나온 이른 새벽

    돌다리를 건너 산을 너머 

    터벅터벅 걸어 가던 고향길 

    무서리 내린 논밭에 돌아가신 할머니 

    하얀 혼령이 나를 부르고 

    네살때 잃어버린 여동생의 작은 무덤이 

    별무덤이되어 빤짝이는데

    관절염을 잃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외양간 옆에 기대어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참을 서성이던 고향, 月村里

    그날 밤 유난히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추억의 밤 열차를 타고 고향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싶다,

    임 시인님의 서정적인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월촌리 




  • 석촌님께
    keyjohn글쓴이
    2021.12.30 10:30 댓글추천 0비추천 0

    석촌님의 젊은 날의 초상!!

    아프고 저린 짧은 컷들이 모아져 아름다운 모자이크처럼 다가 오네요.

    세월이 스며들어 견딜만한 추억으로 각색된 이유 말고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다른 이유들이 있겠지요?


    어쩌면 동네 이름이 하염없이 아름답지요? 달빛이 부서져 쏟아지는 마을-월촌리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한번 지나쳐 보고 싶은 충동이 이네요. 

    지나다 관절염 앓는 외양간 옆에서 취한듯 잠들어 있는 젊은 청년을 만나면 어쩌지...


    추억에 너무 의존하는 노년 위험한 것 아니겠죠?

    오늘도 편안한 하루되시길!!!

  • 석촌님께

    기정님의 수필을 읽고서 저도 긴글을 써 보고싶은 마음이 솟아나네요

    어렸을때 저는 차멀미가 아주 심했었는데 오직 기차여행만 멀미를 하지 않아서

    기차타는게 그리도 좋았어요.

    저는 장항열차를 탔었지요.


    네살때 잃었던 동생의 무덤이 별무덤이 되어 반짝인다는 표현에서는

    아주 진한 감동이 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올려진지 한참된 작품이라도 읽고 감상할수 있게되어서.


  • 이난순님께
    keyjohn글쓴이
    2022.1.6 17:38 댓글추천 0비추천 0

    설란님과 동행하게 되어 기쁨니다.ㅈㅏ주 뵈요.

  • 단골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금단이네 이야기가

    지금 임샘이 글을 쓰게 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미군 부대 숙박업...이미 글로벌적인 휴머니즘을

    어린 임샘에게 넣어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상식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지만

    어려서 터치해야 커지는 감성은 시기를 놓치면 

    힘들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산간 벽지 오지에 머물면서

    어린 아이들에게 감성을 깨우치는 일을 하고 싶은 작은 꿈을 갖고 삽니다.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수필 한 편이 

    지루하고 힘든 삶에 잠시 쉬어가라고 정거장이 되어주네요.



  • 강화식님께
    keyjohn글쓴이
    2021.12.31 10:05 댓글추천 0비추천 0

    지금 연선님 계신 곳도 충분히 고즈넉하고 오지스럽답니다.

    아름다운 오지...!

    그곳에서 꿈을 펼치시길 빕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추스리는 과제라는 것도 잊지 마시길!

    한 해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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