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움에 대하여
지난 해 6월 말이었다. 아내와 함께 3박4일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정으로 싱카포르를 여행했다. 돌아와 오니 7월로 들어선 한국도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귀국한 뒤 아내와 나는 며칠간의 시차를 두고 온 몸 가려움증을 겪었다. 가려움은 어느 한 부위가 따끔거리듯 신호를 주다가 발작적으로 가려웠다. 가려워서 긁으면 피부에 굵은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의식적으로 가려움을 참아보려 애를 썼다. 긁으면 더 가려웠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지불식 아니면 체념하듯 굵어대었다. 정신 줄 놓은 밤에는 더욱 소용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온 몸을 긁어 대었다.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가려움을 달래기 위해 뜨거운 물에도 다시 차가운 물에도 샤워를 해 보았다. 그러나 욕실을 나서는 순간 도로아무타물이었다. 처음에는 연고를 발라 보았으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동네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주사를 맞았으나 하루가 지나면 재발했다. 피부 아래에 내가 모르는 생명체가 기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생체는 나의 머리카락 사이 사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까지 넘나들며 나를 유린했다. 온 정신이 가려움에 쏠려서 어느 한 곳에 집중이 불가능 했다.
불현듯 어린 시절 간지름 태우기 놀이가 생각났다. 네살 때였을까, 다섯살 때 였을까 알 수 없다. 누구랑 그런 장난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상대방의 몸을 간지르며 누가 오래 견디냐 내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재미있는 놀이감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나는 상대방의 두 손이 내 몸의 이곳 저곳을 마구 간지르는 통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내 몸을가누지 못 하고 웃어댔다. 입과 코와 가슴은 주체할 수 없는 웃음으로 온통 흥분 상태였으나 그렇게 괴로울 수 없었다. 상대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은 “이제 그만,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애절한 절규는 발작하는 웃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처음으로 내 몸이 내 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붇거나 멍이 들거나 피가 나지 않아도 아플 수 있다는, 새로운 고통의 영역을 체험한 순간이였다.
갑자기 아득히 내 기억의 해저에 숨어있던 기억이 떠 오른 것은 가려움증의 고통이 극심했던 까닭이다.
가려워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고통이 심해지자 나는 인터넷에서 가려움증이나 아토피 증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한다는 한방병원을 찾아 아내에게 알려주었다. 아내가 한방병원에 상당한 약값을 치르고 병원의 로고가 선명한 커다란 쇼핑백에 들고온 것은 3개월치 선식이었다. 우리는 선식을 먹으면서 육고기, 빵, 고등어 등등 익숙하고 친숙한 음식과 결별해야 했다. 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차도를 보기 시작했다.
한방병원의 진단과 처방은 이러했다. 몸에 독소가 쌓여서 디톡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왜 가려움증이 생겼는지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싱카포르 여행에서 노출된 며칠과 한국에서의 무더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싱카포르는 적도 근처의 나라답게 무척 무더웠다. 단체 여행을 하였으므로 냉방이 잘 된 버스에서 내려 중간 중간 덥고 습기가 가득한 거리를 걷거나 공원을 구경했다. 그리고 식사나 쇼핑을 위해 실내를 다시 에어콘으로 냉기가득한 실내에 들어가곤 했다. 더위를 먹었거나 냉방병에 걸렸을 법했다. 며칠간 의 여행을 마친 뒤 다시 5시간의 시차를 견디며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전기료가 아까와 에어콘을 가급적 틀지 않았다. 노년으로 접어든 신체가 온도조절능력이 약해지면서 몸에 노폐물이 쌓인 탓이었다. 결국 몸에 탈이 난 것이었다.
통증은 흔히 신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한다. 통증의 위치와 강도을 통해 신체 시스템의 이상을 알리고 치유가 끝날 때까지 통증을 느끼는 부분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몸의 곳곳에 고통을 느끼는 신경(통점)이 분포되어 있다. 바늘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거나, 불에 데이거나, 넘어져서 다쳤을 때 통증은 즉각적이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피가 나거나 곪아도 마찬가지다. 통증이 유발된 곳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자극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여 그 곳을 보호하는 것, 동물들이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수십억년 동안 발전시켜운 진화의 결과다.
그런데 가려움이란 신체 반응은 통증과 전혀 다른 기제로 작동한다. 통증이 몸의 외피는 물론이고 그 아래의 근육과 인대, 뼈 그리고 갈비뼈 안의 깊은 곳에서까지 나타나는 반면 가려움은 몸의 외피를 둘러싼 피부의 반란이다. 통증이 자극을 회피하게 만드는 반면 가려움은 자극을 유도한다. 가려운 곳을 자꾸 긁게 만든다. 가려운 곳을 긁었을 때마다 순간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필시 가려움도 신체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인데 왜 자꾸 자극을 유도하는 것인가? 의학계든, 과학계든 현재까지 정확한 이유는 오리무중이다.
이럴 때 힘을 얻는 것이 가설(假說)이다. 나의 돌팔이 아저씨 가설은 이러하다.
몸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통증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 몸 속 깊숙이 숨어있는 장기 중 간, 신장, 췌장 등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통점)이 없다고 한다(이러한 장기에 통증 신경이 없는 이유도 따로 있을 것이다). 장기에 탈이 나더라도 고통이 없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몸에 반응이 나타난다. 예컨대 간이 나쁘면 쉽게 피로해진다. 눈에 황달이 생기고, 몸색깔이 노랗게 변하거나 얼굴이 검어진다. 신장이 좋지 않을 때는 발과 발목이 붇고 쥐가 나며 밤에 자주 화장실을 가야한다. 특히, 몸 속 깊숙이 숨어 있는 장기에 이상이 생기면 노폐물을 처리하지 못해 피에 독소가 쌓인다. 이러한 독소가 피부를 자극하는 것이다. 특정 장기의 이상이 아니더라도 몸의 체온조절능력이나 신체의 컨디션이 바닥을 칠 때도 몸에서 빠져 나가지 못 한 독소가 피부를 자극한다. 이때 몸은 간지러움이라는 자극을 주어 자신을 돌보아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가려움 역시 진화의 과정에서 발전한 새로운 경고신호임이 분명하다. 미운 놈 떡하나 더 주듯, 고통을 주는 대신 쾌락이 담긴 가려움을 준 것이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가려움이란 신체 반응으로 무엇을 해결하려는지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렵다고 긁어대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 가려운 곳이 붇거나, 피가 나기도 한다. 심지어 곪기도 한다. 가려움이 통증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동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가려움을 참아 낼 수 있기에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가려움을 무시하거나 참아내는 것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가려운 곳을 긁어달라는 피부의 욕망과 이를 무시하여야 한다는 뇌의 의지의 충돌이다. 모기에 물린 자국마냥 잠시 참으면 가려움이 결국에는 사라진다. 인간의 의지가 승리하는 대목이다.
결국 가려움증이 생기면 몸의 어느 곳에 독소가 침범했거나 독소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되, 가려움이 주는 유혹 자체는 무시하여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판단을 하여야 한다. 인식과 의지는 결합이다.
물론 세상일이 그러하듯 모든 것이 인식과 의지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려움도 그리 간단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 상태를 0 이라고 하고 통증을 1이라고 하면 0와 1 사이에 무수한 유리수가 분포하듯 정상과 통증 사이엔 가려움은 그 간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온갖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은 것 같다. 참을만한 가벼운 가려움에서 격렬히 치고 나오는 가려움도 있다. 은근히 다가오는 것에서 발작적으로 습격하는 가려움도 있다. 차가운 물을 만나면 진정되는 가려움이 있는가 하면 따뜬한 물을 만나며 시원해지는 가려움도 있다. 다만, 어떠한 경우에도 가려운 곳을 긁으면 증상을 악화시킨다는 결론은 같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유혹에 빠진다. 모두가 우리의 깊은 내면 즉 본능에 기반한다.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생존적 본능과 좀더 많이 갖고, 좀더 많이 알려지고, 좀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사회적 본능에서 유혹이 싹튼다. 우리의 본능 속에 욕망이라는 독소가 쌓인 결과다. 이들 유혹은 한번 손대면 해결될 듯 끌어들이고 때맞추어 쾌락을 선사하면서 숙주를 조종하는 연가시처럼 우리를 조종한다. 두번 세번 빠져들면 삶은 갈라지고 피 터지고 곪아 터진다. 파국이 몰려온다. 가려움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가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에 인식과 의지를 가지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 가벼운 욕망에서 오는 유혹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모기에 물린 자국처럼. 그 욕망은 곧 사라지고 유혹도 힘을 잃는다. 따라서, 항상 본능 속 욕망을 제거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반면 오랫 동안 해소되지 않은 욕망,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욕망이 나의 의지만으로 어쩔 수 없는 유혹으로 커질 수 있다. 긁으면 손톱자국이 남는 가려움증처럼, 불면의 밤을 지세우는 가려움증처럼 나의 의지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 있을 수 있다. 이 유혹을 이기지 못 하면 파멸이라는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처방을 받아야 한다. 나의 영혼을 썩게 만든 욕망을 디톡스해야 하는 것이다. 다름아닌 바로 종교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종교가 있는 이유다.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 같지 아니한가.
갑자기 뒤통수가 가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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