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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을 뿌리는 의사들

관리자2025.05.05 16:15조회 수 13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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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을 뿌리는 의사들

엄상익(변호사)

뭔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십대부터 말(言)을 수집해 봤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우연히 삶의 지혜가 담긴 

보석 같은 한마디를 들을 때가 있다. 

강태공이 물고기를 낚아 어망에 담듯 나는 허공을 헤엄치는 말을 낚아서

 메모 수첩을 어망으로 삼아 그곳에 넣어 두었다.

 나이 칠십 고개를 넘긴 요즈음 그 말들을 다시 찾아 의미를 재해석해 보고 있다.

 영혼을 살리는 좋은 말들이 공책 속에서 은비늘을 빛내며 살아있다.

오늘은 이십년 전 잠시 법률상담을 위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칠십대 말의 늙은 산부인과 여의사의 이런 한 마디가 공책 속에서 나지막한 어조로 들려오고 있다.

“내가 산부인과 의원을 할 때 중앙대학교의 뒷산에는 판자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어요. 

그때는 여자들이 애를 집에서 낳았는데 진통이 오면 내가 불려 갔죠. 

왕진을 갔다 와서 밤 2시경 잠을 자려고 하는데 

다시 누가 찾아오면 정말 싫었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가야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깨달음이 생기더라구요.

 이왕 할 거 싫은 표정을 짓지 말고 미소를 짓자고요. 

처음부터 되는 건 아니고 그것도 훈련을 하니까 조금씩 됩디다.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를 받으니까 돈을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어요. 

그냥 선을 뿌려둔다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살았어요.”

늙은 산부인과 여의사는 일해서 모아두었던 돈을 맡긴 사람에게 사기당했는데도 무덤덤했다. 

나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하며 펄펄 뛰어야 맞았다.

 치매가 걸려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그녀의 마음에 절제와 인내를 주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 늙은 여의사는 갑자기 닥친 고난을 거대한 파도를 큰 배가 늠름하게 넘어가듯이. 

튼튼한 건물이 지진에 견디듯이 그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그런 절제와 인내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다. 

수십년 검사 생활을 했는데도 조금도 검사 냄새가 나지 않았다.

 생선을 쌌던 종이에서는 생선 냄새가 나고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권력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위선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온유한 성품을 타고 태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부여의 백마강 근처에서 평생 작은 의원을 하셨지.

 아픈 시골 사람들한테서 연락이 오면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가시곤 했어.

 한 번은 여름 홍수 때인데 왕진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불어난 강물에

 나무다리를 건너오다가 죽을 뻔하시기도 했지.

 아버지는 일년에 한 번씩 뒷뜰에서 장부를 태웠어. 

왕진비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힌 장부를 없애버리면서 빚을 면제해 주는 거였지. 

아버지가 선을 뿌려둬서 그런지 아들 네 명이 모두 복을 받은 것 같아.

 다 잘됐어. 성격들도 좋고 말이지.”

온유한 성격은 아버지의 덕으로 하늘에서 받은 선물 같기도 했다.

내가 감명을 받은 의사 출신 크로닌이 쓴 소설이 있다. 

의대를 졸업한 주인공이 시골의 고용의사로 취직이 됐다.

 왕진을 갔다가 한밤중에 돌아온 그는 벽난로의 불 앞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누군가 아파서 의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정말 싫었다. 그

때 같이 일을 하는 노의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그게 의사의 운명이라고. 

주인공인 젊은 의사는 비가 내리는 어두운 진창길 속으로 다시 걸어간다.

그 의사의 뒷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변호사의 소명을 깨달았다. 

어둡고 음습하고 원인 모를 냄새가 깔려 있는 감옥들을 돌아다녔다.

 깊은 우물 속 같은 곳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에 소리쳐 주기도 했다.

 그들 또한 사회적 환자들이었다. 

어떤 일을 하던지 근본은 통하기 마련이다. 

선을 뿌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는 진짜 선물은 무엇일까. 

그분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 평화를 선물로 주신다.

 온유한 마음과 절제하는 마음도 주신다. 

그건 재물보다 훨씬 귀한 것이다.

손해를 봐도 아픔을 느끼지 않게 해주시는 걸

늙은 여의사에게서 봤다.

그런 걸 기독교에서는 성령이 주는 열매라고 하던가.

 

 

2025년 5월 5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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