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과
6.25사변(事變)
Harry S. Truman
(1884~1972)은
미국 제33, 34대 대통령으로
20세기의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오지 않은
고졸 출신이다.
어릴 때 Truman은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어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 꿈을 펼치지
못했다고 한다.
학벌도 없고 집안 배경도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었을 때 그가 가졌던
직업 역시 변변찮았다.
기차역에서 검표원을
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상점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잘되지 않아서
문을 닫아야 했었다.
이러한 평범한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Truman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위해 예비해 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용기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혔을 때
약한 자의 편을 드는
정의로운 용기가
Truman에게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원해서
입대했다.
원래 Truman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 통과한 후
포병장교가 되어 열심히
싸웠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용감하고 서민적이고
그리고 아주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이 바로
Truman이다.
1944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1945년 4월,얄타 회담
직후 Roosevelt가
뇌일혈로 별세하자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는데도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처리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Manhattan Project
보고를 받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생각해보면 Truman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재선에서
Truman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대통령 선거 날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Truman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한국전쟁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사람이
Douglas MacArthur
장군이었다.
Truman은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는데도 못 갔지만
Douglas MacArthur는
육사 출신일 뿐반 아니라
수석 졸업생이기도 했다.
이 천재 장군이 얼마나
교만하게 굴었는지
Truman 대통령이 꽤
고생했다고 한다.
Truman 대통령은
Douglas MacArthur
장군과 대립관계 속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내하지만 결국
인천상륙작전 이후
확전(擴戰)하려는
Douglas MacArthur를
해임하기도 했다.
또 Truman과 한국전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다.
이승만은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다.
굉장히 곧고 또 오만한
성격이다.
다 망해가는 나라를
미국이 구해줬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회담하다가도
Truman 대통령을 향해서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느냐?
면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이런 수모를 받아
가면서도 한국을 도와준
사람이 Truman 대통령.
Truman은 두 번에 걸쳐
한국을 도와주었다.
첫째는 한국전쟁에 미군을
파병한 것이다.
미국 시각으로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밤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려던 Truman에게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이런 보고를 받을 때
정치적인 계산을 할 것이다.
이 전쟁이 본인의 나라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Teuman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단 10초 만에 한국전쟁에
미군 참전을 결정했다.
계산할 줄 모르는
농부처럼 트루먼의
생각은 한 가지였다.
나쁜 놈들이 쳐들어왔으니
물리쳐야 한다는 단순
논리였다.
그 용기있는 결정이 한국을
살렸다. 그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골 출신의
Truman을 대통령으로
세우셨다.
두 번째로 Truman은
한국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1950년 10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영국
에틀리 수상은 Truman
대통령에게 한국에
배치된 병력을 유럽으로
철수시키자고 제안했다.
영국의 제안에 미국의
주요한 인물들이 찬성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대사를 지낸 조셉 케네디다.
그는 공개적으로 한국
포기론을 주장했다.
명문가 출신에 정치 감각이
뛰어난 자들은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골 출신으로
의리를 중요시하는
Truman 대통령은
단호하게 반대하고
한국을 도왔다.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도와주면
좋습니다.
그러나 도와주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린다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히 싸웠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철수를
거절하고 의리있게
행동했다.
Truman은 한국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1차, 2차 대전 때에도 하지
않았던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고 그걸 가지고
한국에 쏟아 부었다.
국방 예산을 올리고
중국군과 맞서 싸웠다.
결국 엄청난 돈이 투입되고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목숨을 잃고 10만 이상이
다친 후에야 전쟁이 멈췄다.
우리나라 역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세계사와 우리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미국의 도움에 대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절하 해서는
곤란하다.
젊은 세대들도 이제는 바로
알고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당시 Truman은 한국전에
막대한 물자와 군인을
투입한 것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Truman에 대한 평가는
더욱 좋아졌다.
공산화 위기에 놓인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이 이후
계속해서 성장해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한국을 독단적으로
도와준 Truman에 대한
평가도 더욱 높아졌다.
강대국 대통령 이라기에는
약점이 많고 학벌도
부족했으며 출신 배경도
좋지 않았던 Truman,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시간이 갈수록 높게
평가받는 인물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한반도를 파멸의
위협에서 구해낸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세계에서는 그의
타고난 우직함과 순박함이
약점으로 작용했을지
몰라도, 그러했기에
오히려 한국을 전쟁에서
구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기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끈기있게 실천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고 10초 만에
한국 참전을 결정한
미국의 Truman 대통령!
엄청난 돈 투입, 5만 명이
넘는 전사자(戰死者),
10만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에서도
한국을 포기하고
연합군을 철수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끝까지
지켜준 분!
많은 반대와 비난에도
자기 나라에 비상사태까지
선포하면서 국방 예산을
올려 전비(戰費)를
조달해 준 Truman 대통령!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ㅡ 옮긴글 ㅡ
*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
[[6.25사변(事變) 제15 주년]]
* 전쟁(戰爭) *
독립된 국가 간의 전투(戰鬪)
* 사변(事變) *
한 국가 안에서의 내전(内戦)
• 대한민국의 영토 •
한반도(韓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
• 6.25사변(事變) •
모두가 알고 있는 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侵攻)하여
발발(勃發)한 사변(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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