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梧里) 이원익
나라가 전쟁시 파격적인
진급을 하고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
당시 경상 좌수사는 박홍,
경상 우수사는 원균,
전라우수사는 이억기.
여기에 전라좌수영의
수사로 이순신 장군이
내려 왔으니
예나 지금이나
군대조직에서
파격적인 계급장을
달고 온 이순신 장군을
보고 고참들이
가만히 있었을리가
있었겠는가...
1597년(정유년) 2월,
정유재란,
이순신 정군은
'한산통제영'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형장'이
열리고, 선조임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200여 명)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하옵니다' 하고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문무백관들
모두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선조임금을 압박하고
(선조도 내심 그에 동조)
심지어 이순신을
발탁해주고 6계급을
파격적으로 진급을
시키는데 크게 힘을 써준
유성룡 대감까지도
'공은 공 사는 사'라고
하며 이순신 장군을
죽여야
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의견에 반대를 못했으니,
당시 이순신장군의
역적누명을 쓴 상황이
어떠했겠는가를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왜 이틀이 걸려도
이순신의 사형을
결정짖지 못하고
있었는가?
당시에 좌의정 겸
4개 도체찰사
(계엄 총사령관격)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대감이 선조의 어명으로
왜란이라는 초유의
국가전시상태에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시상태에서
아무리 임금과
문무백관들이
이순신 장군을
'죽여야 한다'라고 외쳐도
'도체찰사'인
오리 이원익 대감의
승락 없이는 선조 임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리 이원익 대감은
거듭되는
선조 임금의 사형 결정
재촉에, 청사에 길이
남는 그 유명한 명 대사가...
'전하께서 나라가 전쟁
중에 신(臣)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臣)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하지
못하옵니다'
오리 이원익 대감의
이 말 한 마디에 선조
임금도 체념을 하고
이틀이나 걸린
이순신 '국형장'에서
문무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체찰사가
그리 말을 하니 이순신이
죄가 없는가 보구나'라
하였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은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
이었다.
당시에 문무백관 200여명
중 오리 이원익 대감만이
반대를 하여
이순신 장군을 죽음에서
살려 낸 것이다.
'백성들이 편안한 것이
첫째요,
나머지는 군더더기일 뿐'
자신을 낮추고 오직
나라와 백성만 떠받든
공복, 그가 있으면 온갖
사물이 제자리를 잡게
되는 소박한, 그러나
비범한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 초가집에 살던
명 재상(영의정)
오리 이원익 대감.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을 알아주는
딱 한사람만 있으면
외롭지가 않은 것이
사내대장부 기질이다.
그것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통에는
더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보면
이순신 장군은 참
행복한 분이었다.
조선 500년의 상징,
청백리 정승
오리 이원익 대감이
자기 편에 굳건히
서 계셨으니...
오리 이원익 대감같은
청백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며
새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원익 : 전주 이씨*
*이순신 : 덕수 이씨*
(둘 사이는 종씨도 아니었다)
2025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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