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을 읽고(독후감)
1. 1. 삶에 대한 부채감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호명되는 한강의 다른 대표작을 읽기 전에 최신작 「흰」을 골라 들었다.
그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를 간신히 통독한 나의 경험치로서는 그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우리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마주대하기가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미 책의 줄거리를 귀가 따갑게 들은 후라도 막상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뼈를 바르는 듯 한 그녀의 문장으로
내가 아파야 할 고통을 맞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최신작 「흰」을 읽은 후에 「소년이 온다」를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흰」의 제재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작가가 태어나기 전인 1966년 출산 후 몇 시간 되지 않아 사망한 언니에 대한 생각이고
하나는 작가가 2014년 폴란드의 도시에서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겪은 경험을 적은 것이다.
모두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제재를 ‘흰’라는 감각적 언어를 통하여 연결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적어나간다.
책의 첫머리에서도 작가의 그런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다.
『처음 이 책을 구상하고 있을 때 여러가지 단어를 나열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개, 백발, 수의』(9면)
그리고 말 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엔?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10면)
모두가 태어날 때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 같은 것일 것이다.
자라면서 자의든 타의든 색깔을 칠하고(칠해지고), 모양을 다듬으면서( 모양이 다듬어지면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흰 색깔과 고유의 빛을 잊지 않고 간직해 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흰」을 읽으면서 작가가 끊임 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저에서 작가 특유의 부채 의식을 느꼈다.
작가는 먼저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던 아픔을 이야기한다.
어머니를 통해 자기 앞서서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숨을 거둔 아기. 흰 강보에 싸여 흙으로 돌아간 언니.
필시 작가는 언니가 죽지 않았으면 태어나지 않았을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느겼을 것이다.
이 부채 의식에서 자신의 삶을 보다 치열하게 살아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후 계속 언니의 죽음과 다른 가까운 이의 죽음의 직시하면서 그 의미에 천착한다.
작가는 다시 그의 아들과 폴란드로 이주해서 약 6개월이라는 짦다면 짧은 체류기간 동안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군의 잔악 행위로 폴란드의 도시가 눈처럼 쌓인 것처럼 하얀 잔해만 남기고 파괴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숨진 역사도 알게 된다.
비록 이 도시가 다시 재건이 되었지만 그 고통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가는 『흰』이라는 형용사와 연관되는 다양한 단어를 통하여 이러한 의미와 감각을 파해친다.
이로써 한 생명의 탄생과 동시에 찾아든 예기치 못 한 죽음이라는 개인적 서사에서 시작하여
한 도시, 한 민족 더 나아가 전 인류가 겪었던 폭력 앞에서의 거대한 멸절이 두개의 실처럼
꼬여 같이 수미일관(首尾一貫)한다.
미처 삶이 무엇인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숨진 갓난아기의 죽음과 삶 그 자체가 주는
무자비한 폭력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의 죽음이 가져오는 비통함이 전해지고,
과거의 비극을 직면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죄책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비록 죽은 언니가 작가의 일부가 되거나 파괴된 도시가 복원되더라도 한 인간으로 느끼는
까닭 없는 부채감은 앞서 간 죽음에 대한 연대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대감은 자신이 고독을 느낄 때마다 고요한 자연 현상 즉, 눈, 비, 아침햇살, 자작나무 숲 등을 통하여
수시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오고 그때마다 서늘한 감정을 느끼면서
인간과 시간, 폭력과 죽음, 위로와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현재를 살아 있는 우리들이 과거의 사람들에게 부채 의식을 느끼고
이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작가의 말에서 이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여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책이었다.』(174면)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넣어준 것은 그것들이었다.』(176면).
작가가 말하는 용기가 바로 이러한 부채감과 치열함의 다른 말일 것이다.
2. 2. 강렬한 시적 산문
2024년 10월 스웨덴의 노벨상위원회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면서
그의 작품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한바 있다.
한강 작가는 대학교 시절부터 시에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대학교 스승은 한강의 습작을 보고 무당기(巫堂氣)가 있다고 말해 주었다고 했다.
처음 등단한 것도 시인으로서였다.
시인 한강이 소설가 한강이 된 것은 1993년 서울신춘 문예에 단편 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부터 였다.
시인 한강이 소설 쓰기에 침착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의 부친이 소설가라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아마 시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문학적 방식과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벨상위원회가 밝혔듯이 한강이 침잠했던 소설의 제재가 역사적 트라우마이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단지 시적 장치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 민족이 거쳐와야 했던 트라우마의 역사를 세세한 부분을 들쳐내고
그 트라우마에서 고통받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긴 호흡이 필요한,
소설이라는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를 통하여 짜여진 그럴싸한 이야기다.
이야기가 그럴싸하기 위해서는 그 허구가 인류의 문화와 역사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구성되거나
과학적, 통계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있음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묘사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사실을 묘사하는데 시적 표현을 동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시는 기본적으로 사실 보다는 감정과 직감을 토대로 구성되는 문학적 장르이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는 사실적 묘사의 대가였다.
신문 기자로서 사실을 전달하는 문체를 이어받아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세기 이후 많은 소설이 헤밍웨이의 문체를 따랐다. 흔히 사실주의 표현 방식이라 부른다.
일제시대에 발표된 소설 중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유정의 동백꽃, 황순원의 소나기 등이 대표적이다.
21세기 들어와 우리나라의 소설은 김연수, 박민규, 정세랑 등 다양한 표현 방식과 문체를 차용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지만
사실주의적 표현 방식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는 시대로의 효용이 있는 것처럼 소설은 소설대로의 효용이 있는 법이다.
무당기 충만한 시적 감수성을 가진 한강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포용하면서 그는 소설의 표현 방식
즉, 서술이나 묘사의 방식을 시적인 언어와 감각으로 변화시켰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자신의 시적 감각으로 버무린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문장 문장 하나 하나가 한편의 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의 대서사시가 소설화 되는 것이다.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노벨상위원회의 평가는 적확했다.
3. 새로운 문학적 실험
「흰」의 장르는 무엇일까?
책표지를 보면 소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 역시 소설로 생각하고 읽어 나갔다.
그러나, 책의 첫머리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읽기를 끝내고 난 뒤
이를 과연 전통적인 쟝르의 분별법으로 소설이라고 구분지을 수 있는지는 의문스러웠다.
작가가 처음 단어 목록을 만들었을 때의 그 단어 하나 각자에 대한 작가 본인의 추억, 감정, 감상을
임의로 적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흰』 이란 단어로 연상되는 여러 모국어를 매개로 작가의 경험과 감정을 즉흥적으로 나열한 느낌이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소설의 풀어쓰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수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까닭에 윤구병 선생의 「우리말 백마디 멋대로 사전」(윤구병, 보리출판사, 2022)과 같이
일정한 단어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기술하는 에세이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였다.
그런데 책을 덮은 뒤 얼마 후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나 개인의 감상 또는 타국의 도시에서 느낀 경험들이
두서 없이 나열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흥적이고 임의적이며 불규칙해 보이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작가의 경험과 감각을 기술하면서도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통일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지런히 묶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흰』 이라는 형용사와 연관되는 여러가지 이미지를 통하여 작가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 관철되었던 것이다.
한강 작가는 책 「흰」을 통하여 기존의 고정된 형식이 아닌, 새롭게 고안해 낸 이야기 방식,
그러면서도 일관되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 방식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의 시적인 표현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시처럼 포괄적이되, 수필처럼 자유분방한 색다른 문학 장르의 가능성이다.
책 「흰」에 나타난 한강의 이러한 시도가 성공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공 여부와는 상관 없이 이러한 시도가 우리 문학사의 또 다른 한 사건으로 남을 것임은 명백하다.
(PS: 물론 이를 새로운 범주로 넣기보다 기존의 작법을 빌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부르거나 작가가 주인공으로 세운 1인칭 소설이라고 강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멋대로 소설」이라고 폄하해도 무방할 지 모른다. 이 모든 반론 역시 반박하기 어렵다. 이러한 논란을 굳이 피하기 위해 이를 소설이라고 양보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강이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실험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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