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입술
최 정례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가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 있었다.
생각 없이 퍼부어 대고 있었다.
신호등 앞인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빗속에 수십 년간 갇힌 것 같았다.
신호등의 불빛이 날카롭게 산란하며
칼날을 그어댔다.
그 여름도 이런 장마 통이었다.
광포하게 퍼붓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우산을 쓰고
깁스한 발에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다른 한쪽에는 젖은 구두를 신고 왔다.
“아니 그 발을 하고 이 빗속을 왜?”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폈고
서로 젖은 얼굴과 산발한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그 무렵 우리의 말은 늘 적절하지 않았다.
서로를 찢는 어리석은 말들을 내던지고
후회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헤어졌다.
기억나는 것은 우산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이 내 입술 가까이에 있었던 것.
눈도 눈썹도 검은 꽃잎처럼 껌뻑이고 있었고,
그의 손등이 내 입술에 닿을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
홍수가 나고 돼지가 떠내려가고 맨홀에 갇혀
누군가 죽어 나가는데도 입술 근처의
감각은 유실되지 않았다.
오만 가지 생각과 결합하려고 거품처럼
떠오르다가도 어디 가닿지 못하고
국지성 호우 속에 갇혀 있었다.
-출처/ 저작가의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2015년)에서
2025년 7월 17일
容恕(용서)
김 남환
너에게로 가기 위해
다시 강을 건너간다
우리를 비끄러맨 질긴 인연을 풀고
건너왔던 이 강을 다시 건너간다
가슴 깊은 자리에 박힌
옹이를 도려내어 저문 강에 던지고
몸져 누운 수척한 내 모습을
오지랖에 새겨 보듬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간다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감싸안기 위해
흔들리며 흔들리며
용서의 강을 건너간다.
2025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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