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본이 원자탄을 맞은 날이다.》
오늘은 일본이 80년전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맞은 날입니다.
그날을 한번 상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미국의 원자탄 투하 결심
1945년 7월 16일 원자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을 조기에 종결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일본 본토에 원자탄을 투하하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원자탄을 투하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연합국이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 결과
일본 정부에 8월 1일까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일본 정부는 1억 총옥쇄(總玉碎:모든 국민이 명예롭게 죽겠다는 뜻) 운운하며
7월 28일 항복 거부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대로 두면 미군의 큰 희생 없이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초조감이 작용했고,
또 하나는 20억 달러라는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들여 만든 원자탄을 써보지도 않고
사장시켰을 때 불어닥칠 국민의 거센 역풍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원자탄 개발에 참여한 <아인슈타인> 박사와
원자탄 개발 연구소장 <오펜하이머>가 "
이 원자탄은 수천명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이니,
절대 사람이 사는곳에 투하 하지말고 무인도 같은 섬에 먼저 투하하여
그 위력을 보고 사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일본 본토를 지상군으로 공격하려면
우리 미군 병력 100만명의 희생이 따를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트루만> 대통령은 과학자들의 건의를 채택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으므로
직접 일본 본토에 원자탄을 투하하라고 승인하였습니다.
군은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고오베] 등 4개 지역을 표적으로 선정하고
509 폭격 비행단을 지정하였으며
지휘관에는 <폴 티비츠> 대령을 임명하였습니다.
2. 원자탄 투하
B-29 폭격기는 1945년 8월 6일 08시 15분에 제 1 표적으로 선정된
[히로시마] 상공 9,800m 지점에서 "리틀보이"로 명명한
13KT 원자탄 1발을 투하했는데 580m 상공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이 때 당일 즉각 사망한 사람은 7만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도시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1945년 말까지 사망자는 16만 6천 명이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가 34만 명이었던 점에 비교하면
인구의 절반이 사망한 셈이었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맞고도 항복을 하지않으니,
미군은 8월 9일 이침에 다시 제 2표적으로 선정된 [고쿠라]에 투하할
원자탄 "팻맨"을 B-29 폭격기에 싣고
비행장을 이륙하였습니다.
폭격기가 [고쿠라] 상공에 도착해 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서 표적이 관측되지않아
오끼나와 쪽으로 돌아가던 중에 [나가사키]가 환하게 관측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종사는 21KT의 원자탄 "팻맨"을 11:00시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렸습니다.
[나가사키]에서는 8만명이 사망하고 역시 도시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원자탄 투하 우선순위가 3번이었는데
2번인 [고쿠라] 대신 맞아버린 겁니다.
억세게 재수가 없었지요.
일본 정부가 손을 들게된 것은 2발의 원자탄을 투하한 직후
"만일 일본이 계속 항복하지않는다면 제3, 제4의 원자탄을 계속 쏘아댈 것이다."
라는 <트루만>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뒤에야
겁을 먹은 일본 정부가 항복을 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원자탄 투하로 수많은 사람이 살상되는 상황을 목격한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철모르는 어린애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장난감으로 주었다."고 탄식하였으며,
<오펜하이머>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고,
<페르미>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I am sory"만 연발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자기들이 개발해 놓고도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피해가 컸기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핵무기가 없는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공갈을 치면,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도 북한에 상응하는 핵무기를 가져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이는 과거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나
우리 <박정희> 대통령의 예(例)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025년 8월 10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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