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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배경
-1961년 전남 여수 출생
- 2019년 미국이민
-1988년 서울대학 법학과 졸
- 1988 20회 사법고시합격
-1991 서울대학 법과대학 대학원 졸(석사)
-1999 국립 해양대학 대학원 수료(박사)
- 2003 University of Denver, School of Law, LLM 수료
-2003 뉴욕스테이트 변호사 시험 합격
- 애틀란타 문학회 회원

벚나무 지다(에세이)

cosyyoon2025.08.12 12:01조회 수 3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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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나무 지다(에세이)

 

 

 

내 이웃집에는 70대 초반의 백인 노부부가 사신다. 우리가 처음 이곳 커뮤니티로 이사올 때부터 유달히 친절했다.

이사 온 며칠 후에는 당신들 집에 부페식 음식을 장만하여 같은 블럭의 이웃들을 함께 불러 모으고 우리가족을  초청했다.

이웃들끼리 서로 안면을 트게 하려는 배려였다. 세심한 정성이 고마왔다. 그들 덕분에 이민 생활의 어색함을 빨리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웃 집 앞마당에는 키가 큰 벚나무 한그루가 있다.

벚나무의 주인 부부는 벚나무의 큰 줄기 중간에 올빼미 모양의 장식을 달아둔 덕분에 언제 보아도 귀엽다.

실제로 이 벚나무는 그 주인들만큼이나 커뮤니티 주민들로부터 유달히 사랑을 받는 존재다.

이 벚나무는 겨울 막바지 쯤 꽃을 피우는데 개화시기가 다른 벚나무보다도 개화가 며칠이 빠르다.

그 자태도 아름다워 한창 꽃이 피면 총 14채의 단독주택들이 들어선 블록 전체가 환해지곤 했다.

이 벚나무를 통해 이웃들은 봄의 전령을 맞이 할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벚나무는 초봄에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할로윈 축제가 끝나면 노부부는 옆이 떨어진 앙상한 가지 가지마다 알룩달룩한 장식을 달았다.

벚나무 주위 잔디에는 조명을 설치했다. 이들 조명과 장식은 성탄절을 넘어 새해 첫날을 넘겨 낮과 밤을 밝혔다.

결국 이 벚나무는 거의 일년 내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셈이다.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나무임에 틀림 없지 않는가.

 

 

 

8월이 막 문턱을 넘어온 어느 날이다. 고국에서 건너온 뉴스를 보니 입추(立秋)라고 호들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는 유난히 맹렬한 폭우와 폭염이 한반도를 덮쳤다.

변해가는 기후의 난폭함에 모두가 지친 탓인지 계절이 가을의 입구에 들어섰다는 소식만으로도 안도를 느끼는 듯 하다.

태평양 너머 이곳도 폭염은 먼 산 불구경이 아니었다.  무더위는 아침부터 찾아와 온 종일 맹위를 떨쳤다.

더위는 나의 하루 일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연히 산책도 해가 떨어진 뒤에 시작된다.

석양 무렵 산책을 하다보면 커뮤니티 내의 각 집마다 아름답게 가꾸어놓은 정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지방의 대표화라고도 할 수 있는 배롱나무꽃과 수국이 한창이다. 꽃무리의 풍성한 무게에 푸른 나무의 가지들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잔디밭 뒤의 정원에는 나리 꽃, 데이지꽃, 골드메리 등 갖가지 색깔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추가 지난 며칠 후 여느때처럼 산책을 나왔다. 당연히 이웃집 벚나무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벚나무의 올빼미에게 안부를 전하다 주위에 노란 잎들이 무수한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달려 있는 벚나무 잎의 3분의 1 쯤은 이미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온 세상의 나무들은 푸르다 못해 검푸른 잎사귀를 뽐내고 곳곳의 꽃들은 오색 드래스로 단장하고 있는데, 어인 일인가.

잠시 놀라 바라 보았다. 어디 아픈가? 걱정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는 블럭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우측에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있는데 그 맞은 편을 따라 조금 경사진 것으로 올라간다.

다시 호수쪽으로 향하는 남쪽 방향으로 새로운 블럭이 나타난다.

초입에 위치한 집의 앞 마당에도 벚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그곳을 지나는데 그 벚나무 아래의 잔디에도 나뭇잎이 적지 않게 떨어져 있있다.

이 나무 역시 5분의 1 정도의 잎이 노랗게 변색되고 있었다. 갑자기 느낌이 왔다.

이맘때 쯤 낙엽을 떨구는 것이 벚나무의 자연스러운 습성인가?

느낌을 확인해볼 심산으로 평소 가던 산책의 루틴을 벗어나 곧장 호수쪽으로 향했다.

 

커뮤니티 입구 초입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를 둘러싼 조금 높은 위치에 수십채의 단독 주택들이 있고 위 주택들 중간에 호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 계단의 상층 입구에서 호수의 전경을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 장정 길이의 나무 벤치 두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계단 아래에는

키가 5층 건물 크기의 아름드리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버티고 서있다.

커무니티 내 도로에서 이 계단으로 향하는 작은 잔디밭 공터에 벚나무 여섯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 벚나무들은 매년 초봄에 이 커뮤니티에서 가장 먼저 벚꽃을 피우곤 했다.

한꺼번에 벚꽃을 피우는 때에 와 보면 호수의 푸른 물색, 호수 건너편의 활엽수의 앙상한 가지, 강렬한 갈색을 띤 계단 아래의 소나무들의 거북이 등 줄기와 푸른 솔잎 색깔이 하얀 벚꽃들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특히 이들 벚나무들은 아직 키가 높지 않은 까닭에 5월이면 잘 익은 버찌를 따먹기도 했다.

 

 

호수가 계단 근처로 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호수가의 벚나무들 모두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이미 낙엽이 떨어져 나무 가지의 상단 부분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어둑한 저녁 하늘을 받들고 있었다.

호수 맞은 편 언덕의 활엽수들은 한창 푸른 녹음을 뽐내고 있는데, 가옥들 앞마당 마다 노랗고 붉은 꽃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건만,

벚나무들은 이미 가을이 한창이었다.

 

 

 

자고로 하나가 나타나면 변이(變異)에 불과하나 둘이 나타나면 추세(趨勢)에 해당하고 셋이상이 나타나면 진리(眞理)가 된다고 했던가.

그날 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십여개에 가까운 벚나무에서 팔월 한 여름에 낙옆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입추 이후 벚나무가 조락(凋落)하는 모습은 일년 사계절의 순환 속의 극히 정상적인 본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든지 나무가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을 나기위한 준비 과정임을 안다.

일조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잎을 유지하는 에너지가 광합성을 통해 공급되는 영양소에 비해 효율이 떨어질 때 잎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수분과 영양을 비축하여 혹독한 겨울을 날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벚나무는 다른 활엽수에 비해 길게는 4개월 짭게는 2개월 먼저 낙엽을 떨어뜨린다. 왜 그러는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먼저 도달한 결론은 모든 잎의 생존 기간은 나무마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활엽수는 4월부터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4월이 신록의 계절이 되는 이유다. 그들의 잎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기간을 산다.

그런 까닭에 9월 초부터 중순부터 서서히 낙엽이 떨어진다.

반면 벚나무 잎이 피기 시작하는 때는 벚꽃이 진 직후부터다. 그러므로 늦어도 3월 중순에는 잎의 생명 주기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8월초부터 잎이 떨어지니 잎은 4개월 반에서 5개월까지 살다가는 것이다.

 

결국 나뭇잎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는 대동소이하다. 활엽수의 공통점이겠다.

그래서 빨리 잎을 틔운 나무는 빨리 낙엽을 지우고 늦게 잎을 틔운 나무는 늦게 낙엽을 지는 이치다.

 

 

인간의 삶도 유한하다. 인간도 아무리 의료기술이 발달하더라도 백세를 넘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두 그 전에 생을 마감한다. 당연히 한 세대 앞에 대어난 세대는 한 세대 앞에서 생을 마감한다.

우리의 손주들은 그들이 30세가 되기 전에 우리의 장례식을 치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 모두 잠시 살다 각자의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일 뿐이다.

 

 

 

다만, 다른 나무들이 한창 한 여름의 일광을 만끽할 때 벚나무가 일찌감치 가을을 예비하고 겨울을 준비하는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벚나무도 다른 나무들처럼 조금 늦게 잎을 틔우고 한 여름의 열기를 즐긴 뒤 늦가을 정취에 취해 천천히 낙엽을 떨어뜨려도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지 않는가.

전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므로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벚나무가 다른 활엽수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다음 해의 봄을 맞이하려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벚나무도 자신의 디엔에이(DNA)를 남기기 위해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를 위해 꽃을 피워야 한다.

벚꽃은 때깔도 곱지만 풍부한 꿀을 가득 담고 있다. 이는 벌의 중요한 먹을거리다.

긴 겨울을 동면한 벌들은 무엇보다도 굶주렸을 것이다. 이른 봄 벚나무는 영양소 풍부한 벚꽃을 피워 굶주린 벌들을 유혹하고 먹여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벚나무는 잎을 띄우기 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파격(破格)을 선택했다.

벚나무와 벌꿀의 공생이다. 벚나무는 이른 봄 벚꽃을 피워 늦은 봄 결실을 맺는 생존방식을 택해 진화해 왔을 것이다.

한 겨울을 풍파를 이겨내고 봄이 오기 직전 새싹이 아닌 새 꽃을 피우기 위해 벚나무는 그만큼 긴 기간의 준비와 비축이 필요함이 틀림 없다.

벚나무가 남들이 한 여름의 파티를 즐길 때 묵묵히 자신의 가을 문을 열고 자신의 골방에 틀여 박혀 내면을 가다듬는 까닭이다.

일찍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는 산사(山寺)의 수도승과 다를 바 없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다가오는 시련에 대처하기 위해 조용히 침잠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가끔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조탁(彫琢)하여 나아가는 것,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도 벚나무와 같을 순 없을까.

 

 

 

한여름, 낙엽지는 벚나무를 보면서 화려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이른 봄의 벚꽃들을 상상해본다.

지척의 벚나무를 통해 작은 깨달음을 준 이웃집 노부부에게 감사한다.

그들은 겨울 바람이 가시기 전 배고픈 벌들에게 꿀을 내어준 한 송이 벚꽃 같은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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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변엔 그렇게 부지런 하고 사려깊은 이들이 꽤 있어서 기쁨을 주고 더 살맛나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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