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한글엔 죄가 없다
준비서면의 내용이 자연스럽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반문했다. 무엇이 자연스럽다는 것인가. 아래한글로 작성한 서면이 나무와 풀과 닮았다는 뜻인가, 바람과 비와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과 구름을 스치는 달과 같다는 말인가. 법관은 그런 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의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물 흐르듯이 표현해 주었다고 덧붙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면 자연스러울 수 있으므로 내가 위에서 아래로 글을 써 내려간 것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아래한글이 아래에서 위로 써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
아니요, 변호사님 준비서면의 내용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선생님, 소송에서 이기려면 준비서면이 하는 말이 당연해야 하지요. 사건의 원인이 참되고 의도의 발단이 옳았으므로 정의로운 결과가 나와야 하지요. 선생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이 백 퍼센트 ‘맞다면’ 승소함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의뢰인이 기뻐한다. 기뻐하는 의뢰인에게 나는 나무의 뿌리 같은, 태양의 흑점 같은 내심을 숨기고 있다.
난 의뢰인의 말이 백퍼센트 진실인지 확신하지 못 한다. 내 경험칙의 반쪽은 그의 청산유수에 빈 구멍이 뻥뻥 뚫여있음을 알고 있다. 인공 섬 꼭데기에서 내려보낸 물줄기가 뻥뻥 둟린 구멍 사이로 사라지고 있다. 뻥뻥 뚫린 구멍을 난해한 법이론으로 땜질을 해 가면서 나의 양심도 미사여구로 메우고 있다.
직업의 도리상 수임료란 명목으로 나의 능력과 지식을 구매한 의뢰인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바겐세일 중이다.
피고의 억울함을 살피셔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여 주십시오, 검사의 공소를 기각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십시오. 결론의 대단원을 읽고 흡족해하는 의뢰인 앞에서 나는 저녁 안개 같은 미소를 짓는다.
아래한글은 자부심 가득 찬 자판을 철떡같이 믿고 준비서면을 완성했지만 나의 확신은 자연스러움과 당연함 사이에서 요요처럼 흔들리는 중. 판결의 요행을 바라는 나는 법률사무소 간판이 드리운 아스팔트 그림자.
요요를 지랫대 삼아 아래한글이 허공으로
그림자를 힘껏 들어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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