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문이라는 끈
미국 이민이라는 결단을 하고 아틀랜타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어느새 6년째가 되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이곳에서 고등학교 동문 모임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20년 높은 선배님도 나오신다.
모임을 갖다보면 자연스럽게 재학시절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게 된다.
당연히 악명높은 몇몇 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상하게도 착하고 순한 선생님들보다 악행으로 소문한 교사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보다 정확히 10년 선배님이 지난 해 한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 놓으셨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무슨 일로 해당 교사로부터 뺨을 맞았다. 자존심 강한 그는 억울함을 대변하기 위하여 맞으면서도 자세가 바뀌지 않았다.
그럴수록 교사는 열이 받아 인정 사정 없이 그를 때렸다. 선배의 얼굴이 터져 뺨에서 피가 흘렀다.
그 교사는 선배를 때리다가 자신의 손 바닥이 아팠는지, 아니면 선배의 모습에 질려 버렸는지 제풀에 그만 두었다고 했다.
사태가 마무리되어 쉬는 시간이 되자 같은 반 학생이 선배에게 와서 이야기 했다고 한다.
“너 알아? 정확히 27대 뺨을 맞았어.”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함께 웃었다.
숨기고 싶은 굴욕과 모욕마저도 즐거움으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수학한 이상 누구나 한번씩은 함께 겪었을 경험이므로.
상처받은 경험일지라도 추억거리로 삼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으므로. 우리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간고사 수학 시험 시간이었다.
처음 보는 깡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쓴 얼굴이 조금 검은 선생님이 시험 감독으로 입회했다.
시험 문제 중 포물선 아래 빗금을 친 도형의 면적을 구하는 문제가 시간을 잡아 먹었다.
외웠던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여 답을 구하는 과정이었는데 숙달되지 않은 까닭에 자꾸 실수가 반복되었다.
마음은 초조해지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식을 다 풀기도 전에 종료 벨이 울렸다.
감독 선생님은 두손을 깍지끼고 머리 뒤로 넘기라고 했다.
다 마치지 못한 답안지가 덩그러니 책상 앞에 있었다. 안타까움과 허탈감에 휩싸여 있을 때 내 이름 석자도 적혀 있지 않음을 알았다.
다시 연필을 들어 내 이름을 적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 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독 선생님의 손 바닥이 나의 양뺨을 연타했다. 나의 갈색 뿔테 안경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불량한 학생에게 분노한 선생님은 자신의 화가 누구러질 때까지 나의 뺨을 갈겨대었다.
도대체 몇 대의 뺨을 맞았을까? 나의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들이 선명히 남았다.
어렸을 때 세수를 시킬 때 외에는 부모님도 함부로 만진 적 없는 나의 얼굴.
낯선 사내가 뿜어낸 분노와 멸시의 손찌검이 낙인 찍혀 있었다.
퉁퉁 부어 오른 얼굴 자국은 며칠이 가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얼굴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 했다.
그 때의 사건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지금까지도 기억된다.
다만 세월이 그 상처를 무늬로 만들고 무늬에서 향기가 나기 마련이다.
그 무늬와 향기를 애교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동문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주는 심리적 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모교에 대한 주미동문들의 기금 모임과 관련된 아틀랜타 모임에서 ‘27대의 따귀’를 맞은 그 선배가 은사님 한 분을 회고했다.
선배가 고1학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귀가해보니 집안이 온통 압류딱지 투성이였다. 괘종시계 하나까지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버님의 사업실패로 집달관이 다녀간 것이었다.
가세가 기울자 선배는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는 손재주를 살려 이른바 수제 앰프(AMF)를 만들어 팔았다.
청계천 상가 등을 전전하며 여러 부품을 모아 진공관 앰프를 만든 것이었다.
어느새 학교에서도 아름아름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때였다. 수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는 큼직한 휴대용 녹음기에 영어회화 테이프를 돌리며 영어공부를 하시던 분이셨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그를 당신의 집으로 불렸다. 영문을 모르고 찾아가 보니 선생님은 불고길를 산더미처럼 마련하시고 먹으라고 하셨다.
돌맹이도 소화를 시킨다는 십대의 나이, 가난에 쪼들리던 그가 얼마나 맛있게 그 불고기를 먹었는지 두말이 필요 없었다.
제자가 식사를 마치고 나자 선생님은 그에게 엠프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는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 요듬 좋은 엠프가 엄청 많이 나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최신 제품의 품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품질이 좋다고 소문난 여러 브랜드를 소개해 드렸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고집을 꺽지 않으셨다.
“나는 제자가 만들어준 엠프를 갖고 싶네.”고 하시며 무조건 엠프를 만들어 달라고 하셨다.
선배는 결국 선생님의 고집에 엠프를 만들어 그리고 소정의 삯을 받았다.
선배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몇년 후 은사님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은사님께서 영어공부를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몇년 후 선배 역시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은사님께서 콜로라도 주에서 사신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미주의 한국어 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D고등학교 24회 졸업생 A가 위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리치시던 B은사를 애타게 찾습니다”.
며칠 후 기적 같이 은사님과 연락이 닿았다. 은사님의 아들 친구가 신문광고를 보고 직접 은사님께 연락을 드렸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직접 엘에이까지 오셨다. 그 감격이란.
상봉한 자리에서 선배가 은사님께 고3학년 때의 에피소드를 꺼내시면 “선생님께서 당시 엠프를 만들어달라고 하셨을 때 자존심 강한 제가 부끄러움이 느끼지 않기 하시기 위해서 배려해주시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은사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래 자네가 그것을 느꼈구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닥친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감수성 풍부한 십대의 학생과 그런 제자를 사려깊게 배려했던 은사님 사이의 아름다운 인연이 눈에 선했다. 감동 실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이켜 돌아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즐거웠다고는 할 수 없다.
쫒기듯 공부하느라 늘 불안했고 초조했다. 항상 잠은 부족했으며 피부병과 과민성대장염으로 힘들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몇 몇 교사들의 폭언과 폭행으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비슷한 처지의 고통을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우정, 대다수 선생님들이 보여준 따뜻한 배려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십대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비슷한 경험과 기억으로 한 시절을 보냈다는 동질감이 우리를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
십대라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교육환경에서 보냈다는 보낸 사실은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도록 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교사로부터 폭언과 폭행을 당한 기억마저도 지금은 서로 웃어 넘길 수 있는 소재가 되기도 하는 마당에,
측은지심을 느낀 은사님의 특별한 배려나 조그마한 친절은 평생의 은혜로 남는 법이다.
이렇듯 공유한 경험과 기억이 좋든 나쁘든 그 하나 하나가 모교사랑의 토대가 됨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모교 사랑을 같이 하는 동문들을 가끔씩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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