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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년

이한기2025.10.07 15:23조회 수 1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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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노년

                             -아해  김태형

 

오랜 시간 우리 곁을 지키며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경기 53회 소식지가 이제 긴 여정을 마친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깊이 젖어 듭니다. 이 소식지는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흩어진 마음들이 다시 모였던 우리 마음속 화동 언덕의 정다운 쉼터였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앞두고 심재영 학형이 ’행복한 노년‘에 관한 글을 청해와 마음이 숙연해지고 자연스레 긴 세월 학창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그 의미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아득합니다. 다행히 지난 88호 소식지에 정희준 학형이 들려준 ’지금 우리는 행복하십니까? ‘라는 깊은 성찰이 실려 있어, 여기엔 내 삶을 돌아보며 작은 숨결 하나를 더 해봅니다.

 

420여 명이던 동기 중 어느새 절반이 별이 되어 떠났고 남은 동기들의 얼굴마다 세월의 그늘이 깊이 드리워졌습니다. 백세시대를 노래하지만, 사실 노년은 그리 길지 않은 소중하면서도 극히 짧은 여정일 뿐입니다. 해마다 나이를 더하는 일은 해마다 나이를 잃어가는 과정인 거죠. 

 

아산병원 시절, 피수영 교수 덕분에 만난 피천득 선생님, 세월의 굴곡 너머에도 따스한 온기와 동심을 품으셨던 분, 선생님이 건네주신 수필집 <인연>과 몇 권의 책은 늘 제 삶에 향기처럼 남아 있습니다. 수필가로 널리 알려진 선생님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54편을 아름답게 우리 말로 옮기신 시인이시기도 하셨지요. 특히 선생님의 시, <이 순간>을 읽을 때면, 노년에도 삶이 얼마나 빛나고, 귀하고, 행복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정희준 학형이 소식지에 언급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스토아학파의 거봉, 세네카는 노년을 ”삶의 즐거움과 성찰의 시기”로 존중하며 “인생의 갈망과 욕망에서 해방된 평온의 시기”로 보았지요. 또 “죽음 자체보다 삶을 의미 없이 사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라고 한 니체의 말처럼, 노년의 진정한 행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학창시절 교가에 담긴 <지덕을 밝히고 품격을 높여, 내 나라의 동량이 되세>라는 구절은, 늘 제 인생의 이정표였습니다. 당시 많은 학교가 윤리적 덕목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조재호 교장 선생님께서 1955년에 제정하신 <자유인, 평화인, 문화인>이라는 교훈은 창의와 품격, 그리고 열린 세계를 품은 미래 인재상을 미리 그려내신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이처럼 뜻깊은 교훈을 남겨주신 교장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솟구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자유인·문화인·평화인의 자세로, 또 교가의 정신처럼 지덕을 가꾸고 품격을 높이며 내 나라의 버팀목으로 살아 내려 했던 자체야 말로, 지금 노년의 기쁨과 여유를 자랑스럽게 누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큰 두려움 없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노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세월의 숲길 속에서 사회 각 분야의 거목이 된 동기들을 떠 올리면 나는 늘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후학을 위해 선진의학의 작은 씨앗이 되었던 시간, 소아암 아이들을 위해 마라톤으로 숨 가쁘게 기금을 모아 왔던 날들이 내 안에 소중한 자취로 남습니다. 그리고 홍난파 가곡을 세계에 알린 정희준 학형이나 기타 장인으로 명성이 높은 최동수 학형의 생애처럼, 또한 피천득 선생님의 베토벤 교향곡 사랑처럼, 노년의 행복한 취미로는 음악이 으뜸인 건 맞지만, 나는 음악에는 재능이 없어 대신 시로 내 마음을 지켜왔습니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을 때나 낮에 텃밭을 가꾸며 식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어의 보석을 더듬는 즐거움 속에서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후학들을 지도하던 때의 마음을 담아 쓴 시, <이방인>, 그리고 조금은 씁쓸한 나의 근황을 가감 없이 적어 본 <디멘치아>를 조심스럽게 내놓습니다. 두 편 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젖어 있는 노래입니다. 

 

이방인

                        -아해 김태형

 

한국에서 태어났다.

의과 대학을 나왔다.

 

미국엘 왔다.

선진의학을 배우러

힘든 날이 많았다.

이방인이라서

 

한국에 돌아갔다.

선진의학을 가르치러

 

또다시 힘들었다.

이방인 취급을 받아서

 

은퇴했다

어디서 살아야 할까?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한국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디멘치아

                     -아해 김태형

예부터

G와 J와 Z의 발음에 땀을 흘렸고

음계의 도와 도#의 간격은 끝내 알 수 없었다

 

요즘엔

올해가 뱀띠인지 용띠인지

기억이 흐릿해지고

 

엊저녁엔

입안을 메워주던 틀니를 찾지 못해

방안을 빙빙 돌았다.

 

삐꺽 대는 관절과 앙상한 근육이

헝클어진 뇌의 시냅스까지 둘러메고

빠르게, 빠르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아직

나만

눈치채지 못한 채    

 

 

추신: 우리 모두의 세월 안에 서로를 비추던 빛과 아련한 정이 이 글에서 조금이라도 전해진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행복일 것입니다. 

 

-2025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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