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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정
- 중앙대 교육학과 졸업
- 2000년 도미
- 둘루스 거주
-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cloudline

keyjohn2020.01.12 16:45조회 수 69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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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없이 쉬는 날은 적당한 홀가분함과 그 보다 약간 많은 고립감이 부딪히며 가벼운 감정의 회오리를 경험한다. 

성탄절 선물받은 원두가 눈에 들어와 산폐가 염려되어 원두 그라인더가 있는 코스트코에 들렀다.

포근한 날씨 탓에 사람들은 입구에 가득한 겨울용품 곁을 변심한 애인처럼 무심하게 지나쳤고, '새로운 제품 없나' 하는 내 호기심에 '거꾸리' 가 눈에 들어와 매달려 보았다. 허리에서 두두둑하는 소리가 나고 발목이나 목근육이 늘어나는 느낌과 함께, 머리쪽으로 피가 쏠리며 눈알이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거꾸리 회사 마케팅 담당자가 되어 광고 카피를 만들어 보았다.

'세월이 앗아간 당신의 키 일인치를 찾아드립니다'

   거꾸리에서 몸을 풀고 돌아서니 긴목의 와인들이 모딜리아니 여인인 양 원목의자에 비스듬히 기댄채 고객을 유혹했다.

Oregon산 2018 'cloudline'이 눈에 들어왔다. 산뜻한 수채와 라벨이 고운탓도 있었지만, Oregon 'May wine month'축제에 다녀 온 지인의 이메일 내용 때문이기도 했다.

"와이너리 포도넝쿨 사이 테이블에 앉아 초코릿 코팅을 한 체리에 태평양 해풍과 Hood산 계곡바람이 숙성시킨 와인을 마시다가, 문득 하늘을 보고 '지금 죽어도 좋아'라는 생각을 했다"는 지인!

'감정의 사치가 심하다'며 부러움 범벅된 핀잔을 주었던 생각을 하는 동안, 내 손은 러시아워 지하철속 치한처럼 와인병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3400미터 Hood산 자락을 휘감고 있는 구름띠 그림이 와인병 라벨을 감싸고 있었다. 중학생 시절 펜맨십 연습에 사용하던 바이칼 잉크색 산이 라벨 가운데를 차지하고, 흑인노예들이 남부의 거친 황토에서 한올 한올 건져냈음직한 목화색 구름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는, 바야흐로 'cloudline'이 반추상으로 그려진 라벨은 일회적으로 아름다웠다.

도발적인 와인평은 흡사 탐미주의 문예사조를 컬트한 작가의 작품처럼 인상적이었다.

'아름답고 진한 루비색 와인과 함께 당신의 후각은 잔속에서 향연에 빠질 것입니다. 

이 향연에는 강렬한 꽃향기 뿐만 아니라 까치밥나무, 레드베리 블랙베리 향기도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애무에 가까운 질감과 긴여운의 풍미에 포로가 되어보세요.'

    와인한병 사들고 '젖먹이 두고 온 애미'처럼 서둘러 귀가해 와인과 조우했다.

그레고리안 성가속에서 마시는 한잔의 'cloudline'으로 나는 고립감의 긴 회랑을 저만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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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선, 텔로미어를 위하여 애틀란타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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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와인 속에 예술과 종교 노예역사 등, 우주를 한 바퀴 돌고 나온 느낌을 주네요. 깊은 감성과 사고 , 그리고 와인 상술 광고까지 더해 읽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올라와요. 건배!!!
  • 이경화님께
    keyjohn글쓴이
    2020.1.13 08:36 댓글추천 0비추천 0

    모임이 수도원생활과 흡사해요.

    와인한잔 없이 경건하니...

    모임에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글로 썼습니다.


    건강유지하길 응원해요. 

  • 원목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유혹의 눈웃음을 보내던 Cloudline 이

    샤를의 법칙, 아니면 임파토스 기법의 깊은 눈을 가진 감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수줍어 얼굴을 붉혔습니다.

    선생님의 "감성의 사치"가 부럽습니다

  • 이설윤님께
    keyjohn글쓴이
    2020.1.13 17:14 댓글추천 0비추천 0

    '과일'이라도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과찬'이시므로 ㅎㅎ


    나이들면서 정신줄 놓으면 안되니

    '로고스'강화의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 keyjohn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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