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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정
- 중앙대 교육학과 졸업
- 2000년 도미
- 둘루스 거주
-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안톤슈낙' 을 슬프게 했던 것들

keyjohn2020.02.06 07:03조회 수 104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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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중략)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중략)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을 보일 때. (중략)
  하고많은 날들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 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중략)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노르웨이 작가)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에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옮긴이 노트
안톤 슈낙의  슬프게 하는 대상은 특별하지 않다.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이 지나간 추억의 부스러기들이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의 글이 1982년무렵 고교 국어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니,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행운이라 생각한다.
 
안개비가 지천인 어제 드라이브를 했다.
스모키마운틴 자락 프랭클린이란 작은 동네를 지나노라니
흰색과 검정띠 등대가 문지기를 하는 교회가 보였다.(어쩌면 당신도 어느날 스모키 마운틴을 유람하다 이 교회를 만나면 안톤슈낙을 추억하게 되리라)
평일인데  차한대가 주차장에 있고, 교회문이 열려 있었다.
인적없는 교회당안 혼자있는 목회자 혹은 신도의 존재가 가슴에 남았다.
교회를 지나쳐 오분도 되지 않아 가랑비를 맞으며 걷는 인디안 청년이 보였다.
이미 사방은 어둑하고, 지향없는  그의 발길을 보니 거처가 염려되기도 했다.
체로키 인디언의 영광을 뒤로하고 Great America에서 소외된 체, 보호구역에서  연명하는 그들의 현실이 '교회당앞 차한대' 위에 오버랩되었다.
어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 도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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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처럼 나는 에르메스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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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네 요즘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은 꽃향기가 없는 꽃들이죠. 정희숙샘 말처럼 조지아의 토질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해요. 작년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꽃내음을 맡았보았지만 무취에 가까웠어요. 이제는 꽃이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답니다.
  • 이경화님께
    keyjohn글쓴이
    2020.2.6 10:20 댓글추천 0비추천 0

    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집니다.잠깐 생각해 본것이지만

    사람들은 꽃을 관계나 외형적 만족의 수단에 가치를 두는것 같아요.

    언제 저도 꽃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은 자극이 되네요.

  • 이경화님께
    향기없는 사람들이 더 슬프지 않을까요
  • 안톤 슈낙의 글을 읽으며 고교시절을 보냈으니 나 또한 행운에 동참합니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쓸모없는 글이 자꾸 쓰고 싶어지는데 막상 써지지 않을 때

    겨울바람 속에도 떨어지지 않고 애처롭게 붙어 있는 나뭇잎을 볼때

    갈대숲으로 가는 돌다리를 건널 때

    오늘처럼 나무가 비에 젖을 때

    그리고 ............


  • keyjohn글쓴이
    2020.2.6 13:44 댓글추천 0비추천 0

    '갈대숲으로 가는 돌다리'를 거니노라면

    마치 '레테의 강'을 건너듯 속세를 잠시 도피할 것같은

    상상이 되네요.


    금새 슬프게하는 몇가지를 꺼내시는걸 보면

    설윤님 감성의 풍요로움에 박수를 보냅니다.



  • 크누트 함순( Knut Hamsun) 의 자전적 소설 "굶주림" 을 읽으며 진도가 나가지 않아

    몸부림도 치고 게으름도 피며 책장을 천천히 넘기다 어느 순간 다 읽고 

    벌레처럼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던 시간들이 생각나네요. 

    "대지의 축복"이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굶주림을 더 좋아 했어요.

    제도권의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물론 나중에 시대적 시류 때문에 해야만 했던.... 이데올로기 적 이념은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 당시는 책이 아주 귀한 시대 였는데도 자기 수양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 같아요.

    덕분에 요즘 책을 드문드문 보는 게으름을 일깨워 주고 크누트 함순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글 잘 보고 갑니다. 

  • 강화식님께
    keyjohn글쓴이
    2020.2.6 15:58 댓글추천 0비추천 0

    '굶주림'을 완독한 유일한 사람(제 주위)이세요.

    평하기는 읽기보다 어렵다고 한 평론가도 있던데요.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하며 육체적 허기끝에 '내머리는 가벼워지고'라고 한  그의 말의 근사치에 접근한 듯 착각도 했습니다.

    온라인대화지만 즐겁습니다.



  • keyjohn님께
    하하하
  • 온라인에서 이렇게 문학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죠.

    맞아요. 굶주림을 다 읽은 사람이 제 주위에도 많지 않아요. 

    심지어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 플랭클린 동네 뿐 아니라

    온 세상에 흰색과 검정띠 등대가 문지기를 하는 교회를 보게되면

    임모 시인을 떠올릴 듯 하다


    그리고

    인적없는 미국교회당을 기웃거리는 초면의 동양인.

    보호구역에 보호된 인디안을

    보호받지 못한 초로의 남자가 훔쳐보는 모습.


    바람을 얽으려는 겨울 여행객


    너의 슬픔에 대해 말하라고 하는 시인이

    나를 정말 슬프게 한다


  • 인적없는 집안에서

    글쟁이들의 사상을 안주삼아

    데킬라를 스트레이트로 털어 넘기는 시인은

    너를 슬프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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