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에는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험담은 자제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의 강의 자료

강화식2022.08.04 12:29조회 수 147댓글 3

    • 글자 크기
강의1
시란 어떤 글인가?

시란 무엇인가? 어떤 글인가? 한마디로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에
대한 정의를 모두 모은다면 도서관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시는 우선 언어로 표현된 문학 작품이란 데에 합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도구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언어에 의해서 유지되고 발전했
습니다. 분명히 언어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언어가 다시금 인간을 만
든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언어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동원됩니다. 매우 유용하고 실용적인 삶
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언어는 예술작품의 하나인 문학 작품을 만드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문학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면서도 짧은 형식의 문학 작품이 바로
시입니다.
시를 말할 때 다시금 합의해야 할 것은 표현 도구는 언어이지만 내용이 되는 재료
는 감정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의외로 감정적인 생명체입니다. 감정이 인간의 삶
의 전반을 지배합니다. 심지어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행복감을 결정하는 요인의
80%가 감정이 차지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의 전제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가 인간. 둘째가
언어. 셋째가 감정. 이 가운데서 다시금 주목을 요하는 항목은 감정입니다. 시의 질
료가 철저히 감정이라는 점.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건이나 사실이 아닙니
다. 여기에서 시와 산문의 갈림길이 생깁니다.
모든 문장은 시의 문장과 산문의 문장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의 문
장을 운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운문이란 말이 시의 속성을 충
분히 설명하거나 대변해주기 어렵습니다. 그냥 여기서는 시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시가 어떤 글인가를 말할 때 시는 산문과 어떻게 다른가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시는 산문에 비하여 길이가 짧습니다. 감정을 주된 질료로 삼
습니다. 비약이나 생략, 때로는 비문(非文)까지도 인정합니다.

한의사들의 말에 ‘일침(一針) 이구(二灸) 삼약(三藥)’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질병을 치료할 때 제일 급하고 빠른 것이 침이고 두 번째가 뜸이고 세 번째가 약이
란 뜻입니다. 여기서 침이 바로 시입니다. 시급한 증상이 발생했을 때 했을 때 환자
의 경혈을 찾아서 침을 찌르는 것입니다.
대번에 강한 자극을 주는 것이 바로 침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감정적
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좌면우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에게 급
하고도 효과적인 말로 자극을 주어 그 감정의 질곡에서부터 빠져나오도록 도와주
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 시를 이야기해볼 수도 있습니다. 역시 산문과 비교해
서 이야기합니다. 산문이 ‘작정을 하고 쓰는 글’이라면 시는 ‘작정 없이 쓰는 글’입
니다. 미리 이런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쓰겠다 설계도 하고 자료준비도 하고 쓰는 글
이 산문이라면 시는 그런 준비 없이 쓰는 글이란 말입니다.
글을 쓰게 하는 주체가 다릅니다. 산문을 쓸 때 인간이 글의 주체가 된다면 시를
쓸 때는 시가 글의 주체가 됩니다. 억지로 써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 그것이
스스로 써져야만 써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말에 생산을 이르는 말이 여러 가지 있
는데(만든다-물건, 짓는다-옷, 밥, 농사, 낳는다-아기) 시는 ‘낳는다’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를 낳을 때도 그렇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아기를 낳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때가 되어 밖으
로 나오고 싶어져야만 엄마가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엄마는 아기를 낳
는 일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 되어야만 합니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쓸 때 주연의 몫은 어디까지나 시가 맡아야
하고 시인은 조연의 자리에 섭니다. 시인이 억지를 부리고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시가 이지러지고 변형이 되어 흉한 꼴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이야기할 때 ‘울
컥’이란 말을 동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시인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그 무엇(감정, 정서, 정신, 영혼)
이 불쑥 말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울컥 내면의 그 무엇이 밖으로 나
올 때, 그것을 시인은 재빠르게 손상 없이 받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쓸 때 외워서 쓰기를 주장합니다.
시를 외워서 쓰자는 것은 입말 중심으로 시를 쓰자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의 말에
는 입말(구어)과 글말(문어)이 있습니다. 입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
어진 것이 글말입니다. 하지만 보다 자연스럽고 친근하고 근원적인 말은 입말입니
다. 글말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입말이란 것입니다.
입말로 시를 외워서 쓰면 외워지지 않는 문장이나 단어는 떨어져 나가게 마련입
니다. 그리하여 언어끼리의 상생력이 극대화됩니다. 서로 끌어당기고 서로를 살려

주는 힘입니다. 그러할 때 시는 독자들에게 가서 손쉽게 읽혀질 것이고 또 쉽게 외
워지기도 할 것입니다.
시는 평범한 생각이나 상식적인 느낌을 쓰는 문장이 아닙니다. 보다 심원하고 특
별한 감정을 쓰는 문장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시를 가리켜 ‘발견의 문장’이라는 말
을 자주 합니다. 자연과학자나 탐험가나 여행가가 그들의 분야에서 새로운 그 무엇
을 발견하듯이 시인도 자시 인생행로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로 느낌의 발견, 인생의 발견입니다. 살아가면서 접하는 많은 사물이나 인간,
즉 세상 속에 숨겨진 비의(비밀한 뜻) 같은 것을 찾아내는 발견입니다. 그러할 때
시는 언제나 어디서나 빛나는 것이 되고 새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고 한탄하는 사람들의 말은 허언이 되는 것입니다.
시를 설명할 때 연꽃과 연꽃이 피는 과정을 예로 들면 매우 유용합니다. 해마다
초여름이 오면 연못에 연꽃이 피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매우 아름답고 기
품이 있는 꽃입니다. 연꽃은 꽃이 피기까지는 그냥 연못의 썩은 흙 속에 뿌리로 있
었습니다. 그것도 옆으로 고구마 줄기처럼 뻗어 있는 줄기입니다.
어느 날 없는 듯, 죽은 듯하던 연의 뿌리에서 새싹이 하나둘 솟아나 물을 뚫고 물
밖으로 올라옵니다. 매우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그 이파리 하나하나는 독립적인
줄기를 가지고 있고 그 줄기 위에 커다랗고 우아한 이파리를 펼쳐집니다. 그 이파
리가 햇빛을 받아 새롭게 영양분을 만들어 뿌리에게 보내면 뿌리는 그 영양분을 받
아들여 새롭게 새싹 하나를 뽑아 올립니다.
그 새싹이 줄기가 되어 역시 물을 뚫고 올라가 허공에 꽃을 피웁니다. 아주 특별
하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생명의 극치에 도달한 꽃입니다. 이 연꽃과 같은 존재
가 바로 시입니다. 그러할 때 시인은 연꽃 옆에 독립적인 줄기를 세우고 서 있는 연
의 이파리가 되겠습니다. 연꽃이 아들의 성격을 지닌 자성(子性)이라면 연 이파리
는 어머니의 성품을 지닌 모성(母性)이라 하겠습니다.
연꽃과 연의 이파리가 다같이 연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듯이 시인과 시는 시 정신
에 연결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안정감 있는 시가 됩니다.

*함께 읽는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
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
다. ― 나태주, 「시·1」

강의 2
사람을 살리는 시

*사람을 울리는 시
우리 인간은 이성도 있고 감성도 있는 존재입니다. 이성은 무엇인가를 알고 기억
하고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마음의 능력입니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이고, 또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때도 이 분야를
중심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아예 인간의 능력이나 가능성의 척도를 이성적인 요소
로만 국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성적인 요소보다는 감성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게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하는 것도 감성적인 요소
나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스펙트럼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시비(是非)의 마음은 이성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마음이고 호오(好惡)의 마음은
감성적인 마음에서 출발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와 호오, 그 가운데서 보다 강력한 마음은 호오의 마음입니다. 일단 시비, 옳
고 그름의 마음은 한 번으로 결판이 납니다. 그러나 호오, 좋고 싫음은 절대로 한
번으로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뿌리가 깊고 수정이 잘되지 않는 마음이 바
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고 멀리까지 안내하는 마음도 바로 호오
의 마음, 즉 감성의 마음입니다.
문학 작품 가운데서도 시는 많은 부분 감성의 마음에 의지하는 예술품입니다. 그
러므로 시는 사람의 마음을 울려줍니다. 아니, 울려주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울려
준다는 것은 공감을 말하고 감동을 말합니다. 감동, 임팩트― 그것은 시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요 조건입니다. 감동을 하게 되면 엔도르핀보다도 강력한 다
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나온다고 그럽니다. 이 호르몬이 우리를 기쁘
게 하고 만족감을 갖게 하여 끝내는 행복감에 이르도록 한다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시를 읽고 시를 사랑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응원하는 시
인간은 어디까지나 즐거움을 쫒는 성향이 강하고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강합
니다. 하기 좋은 말로 헌신, 봉사, 희생, 그런 말들을 하지만 인간은 다분히 이기적
인 존재이고 이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속일 수 없는 한 본성입니다. 왜 우리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읽는가? 시를 읽고 좋아해서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시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시를 읽지도 않을 것이다.
역시 시도 읽어서 이로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슨 이로움인가요?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이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이로움, 정신의 이로움입니다. 마음의
기쁨이요 만족입니다. 한 발 더 나간다면 힘겨운 삶에 대한 위로와 응원입니다. 그
래, 당신 마음을 내가 알아.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야. 당신은 그 힘든 마음이나
어려움에서 헤어나야만 해. 그래, 당신은 충분히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칭찬 받
을 자격이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내가 그것을 보장하고 내가 그것을 응원할
거야.
만약 우리가 읽는 시가 이런 암시를 주고 이런 역할을 해 준다면 그 누구도 시를
읽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런 심정으로 시를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살
아가는 일이 힘들고 지친다고 말합니다.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호소합니다. 의기소
침해 있고 소외감, 열등감에 빠져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도시화, 과학화로 삶이 복잡해졌고 상
호비교로 상대적 빈곤감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존재감이 턱없이 낮아진 까
닭입니다. 지금처럼 한자로 ‘휴(休)’자가 많이 사용되고 ‘힐링’이란 생뚱맞은 단어가
많이 사용된 세상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새로운 관심과 화두는 휴식
과 치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 위로가 되겠고 무엇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결코 밥이나 옷이나 그런 현실적인 것들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마음을 다치
고 마음이 힘든 데에는 마음의 치료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려 주고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마음을 밝게 해 주는 그 어떤 방책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가
장 적절하게 동원해야 할 것은 시입니다. 최근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들까지도 열정
적으로 시를 좋아하고 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가 바로 우리의 정신적인 어

려움을 해결해주는 묘약이란 것을 새삼 느끼고 깨닫곤 합니다. 마음의 화이팅! 그
뒤에 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보다/ 두 셋이서 피어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의초로울 때 있
다// 두 셋이서 피어있는 꽃보다/ 오직 혼자서 피어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
울 때 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 나태주 「혼자서」 전문

언젠가 한 번 제주도 귀일중학교에 강연을 간 일이 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학생
들에게 사인을 해주는데 여학생 하나가 내 앞에 와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쓴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 그 학생은 2학년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사실 나는 그 시를 써서
시집에 넣기만 했을 뿐 별로 관심이 없어 잊고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놀
라웠습니다. 왜 그 작품이 좋았느냐 물었습니다. 자기는 이 시 가운데 특히 마지막
연이 좋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아마 그 여학생도 ‘혼자 외롭게’ 있으면서 힘들게 지냈던 기억이 있었던 모양입니
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힘든 때가 있고 외로운 때가 있고 지칠 때가 있고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시인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외롭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해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게을리하
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이 시대에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럽고 비아냥거리는 문장을
즐겨 읽겠습니까! 마땅히 반성이 있고 수정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시
실로 시는 매우 단출한 문장으로 어찌 보면 하찮은 문학 형식일 수 있습니다. 외
형도 왜소하고 내용도 별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더욱 무익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가끔은 시 한 편을 읽고 삶의 의욕을 되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삶의 궤적을 바로 잡
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의 영광이요 독자의 축복입니다.
공주에는 내가 관여하는 공주풀꽃문학관이란 집이 있습니다. 주말이면 주로 그곳
에 머물며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대화를 하는데 때로는 방문객들
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기도 합니다. 어느 날인가는 서울에서 찾아온 여성 독자분이
자신은 우울증에 오래 시달렸는데 시를 읽고 나서 우울증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라는 마음이었고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기도 했습

니다. 아,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시가 우울증 환자를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그것이 그렇다면 진정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큰 병 얻어 중환자실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버지 절룩거리는 두 다리로 지팡이 짚
고/ 어렵사리 면회 오시어/ 한 말씀, 하시었다//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 몸은 약했지
만/ 독한 아이였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아버지 말씀이 약이 되었다/ 두 번째 말씀이 더욱/
좋은 약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쓴 「좋은 약」이란 작품입니다. 2007년, 큰 병에 걸려 중환자실에
있을 때 연로하신 아버지가 면회 오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쓴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란 문장입니다. 실은 이 문장은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징글징
글’이란 단어는 결코 긍정적인 경우에 쓰이는 단어가 아니고 부정적인 경우에 쓰이
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말 밖에는 다른 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순간을 견디면서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그렇게
도 마음의 힘이 될 수 없을 만큼 힘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잘
쓰는 표현에 ‘내 몸이 기억한다’란 말이 있는데 그야말로 나의 마음만이 아니라 나
의 몸, 그러니까 전신이 기억해서 삶에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인내가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아니 이 문장은 죽을 사람을 살렸다는 것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이란 것은 이렇게 엄중하고 다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어 하나나 짧은 문장에 관한 이야기지만 실지로 시는, 시를 읽는 사람만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에게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나는 왜 어린 시절부터 시에 매
달렸고 시를 썼던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고
시를 쓰면 마음이 놓이고 편안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내가 살
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법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실로 한 편의 시가 인간을 살립니다. 시를 읽는 독자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도 살립니다. 부디 당신이 어렵사리 찾아서 읽는 시가 당신을 살리고 당
신의 이웃을 더불어 살릴 수 있는 묘약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읽는 시
한때 나를 살렸던/ 누군가의 시들처럼// 나의 시여, 지금/ 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
도/ 살려주기를 바란다. ― 나태주, 「나의 시에게」

강의 3
회복기의 삶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하나도 신나는
일,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을 바꾸어 볼 필
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라는 미국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헛되게 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
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도 아
니고 내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날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는 날
은 오늘뿐입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입니다. 그
렇다면 오늘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날입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은 나의 생애에 남은 날 총량 가운데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이
고 첫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또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새날과 첫날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첫사람이고 또
새사람입니다.

이런 생각 하나만 바꾸어도 세상은 갑자기 눈을 뜨는 세상이 되고 눈부신 세상,
찬란한 세상이 됩니다. 부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루한 세상, 짜증나는 세상, 누더
기같이 낡은 세상이라고 꾸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세
상만 그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말을 인용해보고 싶습니
다. 보들레르는 시를 이야기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은 회복기에 이른 환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복기란 마치 어린 시절로의 회귀와도 같다. (...) 아이
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는 언제나 도취해 있다.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
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아이가 형태와 색채를 흡수하는 기쁨과 가장 닮아있다.’
우리도 주변에서 가끔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암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그에게 세상은 오직 눈부신 세상이고 새로운 세상이고 아
름다운 세상이고 찬란한 세상일 뿐입니다. 그에게 있어 무엇 하나 새롭지 않고 감
사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다. 그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는 사람이고 감동하는 사
람이 될 것입니다.
암이란 질병에 걸렸던 것은 분명히 불행이고 악운이지만 그 이후의 날들은 축복
의 날들이 될 것입니다. 실은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2007
년의 일이니까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 나는 분명히 죽을병에 걸렸었지만
끝내 살아서 병원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런 이후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날마다 나는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되었고 사소한 일에도 취한 사람이 되었고 의미
를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냥 터닝포인트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반전의 인생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병들고 왜소해졌으며 많은 가능성이 사려져 버렸지만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고 좋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겨우 이만큼밖에 남지 않았
다고 투정하는 사람에서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생이 지루하십니까? 따분하십니까? 아무것에도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기대 수준을 조금만 낮추어 세상을
바라보아 주십시오. 자기 자신을 해바라기라고 생각지 마시고 채송화라고 여겨보
십시오. 큰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채송화는 애당초 키가 작기 때문에 해바라기처
럼 넘어지거나 줄기가 부러지지 않습니다.

*함께 읽는 말
*보들레르 「회복기」 : 회복기란 마치 어린 시절로의 회귀와도 같다. 회복기의 환자는 아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해 보이는 사물에도, 날카로운 흥미를 느끼는 능력
의 최고의 상태에 사로잡혀 있다. (...) 아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본다. 그는 언제나 도취해

있다.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아이가 형태와 색채를 흡수하
는 기쁨과 가장 닮아있다.
*랭보 「견자(見者)」 :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누군가 나를 생각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말의 유희를 용서하라. 나는 타자이다.
*박용철 「시적 변용에 대하여」 : 흙 속에서 어찌 풀이 나고, 꽃이 자라며, 버섯이 생기고,
무슨 솜씨가 핏속에서 시를, 시의 꽃을 피어나게 하느뇨? 변종(바뀐 품종)을 만들어 내는
원예가, 하느님의 다음 가는 창조자, 그는 실로 교묘하게 배합하느니라. 그러나, 몇 곱절이
나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랴!
*전봉건 시인 : 살아난다는 보장만 있다면 사람은 젊어서 죽을병에 한 번 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강의 4
꿀벌의 언어

세상의 모든 음식물 가운데 가장 정결하고 아름다운 음식물은 젖과 꿀입니다. 그러
기에 성경에서도 보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
다. 젖은 동물에게서 나오는 음식이지만 그 동물을 해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음식
입니다. 또 그 음식은 어린 것들을 기르고 가꾸는 거룩한 먹이가 됩니다. 꿀은 식물
에서 얻는 음식인데 역시 가장 고급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입니다.
나는 여기서 꿀과 연결하여 시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또 시인에 대해서도 이
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꿀은 본래 꿀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꿀
은 꽃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꽃들이 생존수단으로 꽃가루받이를 하기 위해 스스

로 마련한 것이 꿀입니다. 이렇게 꽃들이 준비한 꿀을 꿀벌이 찾아가 모은 것이 꿀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꽃꿀’이라고 하지 않고 ‘벌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를 두고서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본래 꿀이 모든 꽃에게
있었던 것처럼 시는 세상 만물,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과 느낌, 그 삶속에 이미 내
재한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시인들이 가져다가 자기의 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렇지만 아무도 그러한 시를 세상 모든 사람의 시라고 말하지 않고 시인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꿀의 경우에서 꽃의 꿀(꽃꿀)이 아니라 벌의 꿀(벌꿀)이라고 말하는 것
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인들은 겸손해야 하고 늘 자기만의 문제나 느낌, 생각에만 몰두하
지 않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그것에 대해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 부드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오만이나 자만, 현학, 자기 자랑은 금물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시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시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문
제만이 아니라 ‘너’의 문제에 보다 더 큰 비중을 갖고 살가운 관심의 눈을 주어야 하
고 또 너의 고통과 슬픔, 실패, 불행, 고난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벌꿀처럼 유용하고 두루 인간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시
인 또한 한 마리 꿀벌처럼 부지런하고 선량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시대에 시와 시인이 지지 받을 도리가 없고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가령,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약국에 가서 어떠한 약을 사서 먹습니까? 당연히 아픈 증상이 사라
지는(병증이 낫는) 약을 사다 먹습니다.
시도 마찬가지고 시인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제는 유명한 시, 유명한 시인이 아
닙니다. 그것을 독자들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이 지금 마음으로 아프고 살기가 힘들다고 호소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 즉각적
인 대책은 못 된다 하더라도 위로를 주고 어루만짐이라도 주고 동행의 마음이라도
허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시가 앉은 자리는 시인에 신뢰나 존경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냥 줍는 것이다//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 ―
나태주, 「시」 전문

이것은 역시 내가 쓴 시로서 시의 속성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애당초 꿀이 모든
꽃들에게 산재해 있는 것처럼 시 또한 모든 사람들, 모든 사물, 모든 삶과 사건들
속에 숨겨져 있던 것들입니다. 얼핏 보기엔 버려진 물건, 쓰레기처럼 보입니다. 그
렇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단연 보석입니다. 그러한 보석
을 시인들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러할 때 시인과 시는 다시 한
번 편안하고도 넓은 지평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끔 나는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말씀을 그렇게 함
부로 막 하지 마십시오. 제 곁에서 그렇게 좋은 말을 하면 제가 그 말을 훔쳐다 시
로 쓸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기에게 욕을 하는 줄 알았다가 듣고 보니 자기
의 말이 좋다는 말이고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이니 오히려 즐겁게 웃는 경우가 있습
니다. 이처럼 시는 너의 것이 나의 것이고(또 나의 것이 너의 것이고) 서로가 상통
하면서 유쾌하게 주고받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강의 5

코로나 이후의 삶과 문학

오늘날 우리는 참으로 특별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이후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19 사태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홍수나 쓰나미같이 우리의 일상
을 덮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도 코로나 19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합니
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장기화하면서 우리의 삶은 형태는 완전히 바뀌어버렸습니
다. 손쉽게 사람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대단위 모임이나 행사도 할 수 없게 되었습
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와 학교가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입니
다.
팬데믹이요 세계적 추세라니 어쩌는 수가 없는 일이지만 온갖 경제활동, 생산활
동이 정지되거나 뒷걸음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화 분야는 더욱 심각한
타격에 입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행이나 레저 같은 분야는 아예 재기할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 도시 공주만 해도 거리 풍경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자
동차가 드물고 행인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그만큼 외출이나 외식이나 모임
을 자제한다는 것이니 그러다 보니 이전의 활기찬 생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게 된
것입니다.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자주 갑니다. 터미널에 내걸린 버스 시간표를 살
피면 버스의 운행시간이 대폭 조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주 서울 간 고속버스
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인천공항행 버스 시간표 위에는 완전히 검정 테이프가 붙어
있습니다.
인천으로 가는 공항버스 노선이 아주 사라졌다는 이야기이고 그것은 또 비행장에
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운수업이나 항공업이 제대로 운
영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일파만파로 코로나 19는 우리의 삶을 위축시키고 변
화시켰습니다.
코로나를 피하는 길이 비대면, 비접촉이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좋은 인
간의 삶은 가까이 대면해야만 하고 밀접하게 접촉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을 깨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
입니다.
삶이 많이 적막해졌습니다. 허전해졌습니다. 마치 10년이나 20년 뒤로 돌아간 세
상에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날 속에서도 새로운 것이 없지 않았습니
다. 그동안 밖으로만 나돌던 자신을 불러 세워 내면을 바라보게 한 일이 그것이고
주변의 자연을 살피게 한 일이 그것입니다.
요즘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푸른 하늘이고 푸른 하늘에 뜨는 흰 구름입니다. 이
것은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중국의 공장이 멈춰서서 그렇고 비행기가 많이 뜨지를
않아 하늘이 깨끗해져서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만 해도 청소년 시기에 보았던
하늘과 구름을 다시 본다는 느낌입니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으로서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출판사 사람들입니
다. 아는 출판사 대표의 말은 나에게 조용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오
프라인 서점이 모두 소멸해서 책이 안 팔리는데 자기네 출판사 책만은 예외라는 것
입니다.
날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책이 많이 팔린다는 얘깁
니다. 오프라인 서점이 아니라 인터넷 서점을 통한 판매가 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자기네 출판사 책 가운데 가정 안에서 하는 활동을 다룬 책들이
주로 많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리 분야의 책이 많이 팔리고 인테리어, 반려동물 돌보기, 색종이 오리기나
종이접기 같은 어린이용 책들이 많이 팔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어른들도 갇혀서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그런대로 잘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
의 발달과 배달 문화의 덕이 컸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시사점을 얻습니다. 우리의 문학, 내가 쓰는 시에 있어서도 오프라인에만 의
존할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문학강연도 온라인으로 하자고 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대면 비접촉의 상황 속에서 활로는 그 길밖에는 없는 실정입니다. 정말로 나는
몇 차례 청중 없이 녹화 촬영만으로 문학강연을 한 일이 있습니다. 유튜브 방소에
출연하여 책에 대하여 대담을 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운영하는 풀꽃문학관에서도 하루속히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여
전국의 독자나 이용자와 소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코로나 19 이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서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가져다 분 변화의 한
조짐입니다.
코로나 19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이제 앞으로 비대면 비접촉으로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소통이 지속적으로 강조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수작업으
로 하는 아날로그식 문제 해결방법이 여전히 유효하게 대두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지털 방식인 온라인과 아날로그의 공존이 우리의 활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대면 비접촉으로 인간이 고립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것이 정서
적인 문제입니다. 고독감, 비애감, 소외감, 불안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때를 대비하여 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는 감정을 주로 다루는 문
학 양식입니다. 우리의 시 작품이 위로와 축복과 응원과 감동을 준다면 시를 요구
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함께 읽는 인터뷰(그린북 이화진 편집장)
요즘 책을 많이 사는 사람들은 20대, 30대, 40대 여성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싱글 여성
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투자를 과감하게 하고 자기만족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
로 그들은 돈을 잘 쓰고 책을 많이 삽니다. 요즘은 20대 여성들도 사는 일이 힘들어 위로
받고 싶어 하고 40대 여성들은 이리저리 치어서 위안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
러 세대에 걸쳐 공감을 줄 수 있는 시집을 많이 요구합니다.

*함께 읽는 시
세상이 많이/ 헐거워졌다/ 쓸쓸해지고/ 많이 늙었다// 거리가 훨씬 느슨해지고/ 잡초가 무
성해졌다/ 바람이 더 많은 하늘을 차지하고/ 구름이 많아졌다// 가까운 사람 멀어지고/ 먼
사람은 더욱 멀어진 날들// 잘 있겠지 그래 잘 있을 거야/ 만나서 밥이라도 한번/ 나누면 좋

으련만// 허!/ 어머니도 그 나라에서/ 편히 계시겠지요? ― 나태주, 「포스트 코로
나·1」

몇 년 만에 만나는 하늘인가?/ 젊은 날에 보았던 봄 하늘/ 그 야들야들한 옥빛/ 멀리 보이
지 않던 산의 능선이/ 가깝게 보인다/ 이러다가는 백두산이 보이고/ 히말라야의 봉우리까
지 보이겠다. ― 나태주, 「포스트 코로나·2」

사랑한다/ 얘야// 왜/ 기분 나쁘냐?// 그렇다면/ 취소. ― 나태주, 「취소」

결혼은 실수다/ 두 번 실수하지 마라. ― 나태주, 「주례사」

문학강연 마치고/ 사진 찍는 시간/ 누군가 말했다/ 좀 벗어봐/ 누군가 또 말했다/ 좀 야하
다. ― 나태주, 「마스크」

강의 6
「풀꽃」 시에 대하여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올해로 50년. 독자들에게 나의 대표작을 물으면 대번에 「풀
꽃」 시를 말하고, 많은 사람들은 대놓고 나를 ‘풀꽃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문

학강연을 많이 하는 것도 실은 ‘풀꽃’ 시 한 편 때문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입니
다. 오로지 ‘풀꽃’ 시가 온 국민에게 두루 알려졌기에 그런 것입니다.
실상 ‘풀꽃’ 시는 내가 43년 동안 시골아이들과 초라하게 생활해온 데 따른 영광
입니다. 그것은 또 시골 아이들이 준 선물과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풀꽃 시인’이란
명칭 또한 독자들이 준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데서도 시인은 저 혼자서만 독
립적으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시는 일견, 밋밋하여 그냥 아무렇게나 십게 쓰여진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의 속내를 알아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글자 수로 보면 24자. 형식으로 보면 3연, 5행. 문장으로 보아서는 세 문장입니다.
참 단출한 시입니다.
제목이 ‘풀꽃’이니까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은 풀꽃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쁘지도 않
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풀꽃. 돌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없는
풀꽃. 어디서나 자라는 흔하고도 천한 풀꽃. 그런 풀꽃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기만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43년 교직 생활 가운데 나는 수없이 많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언제자 예쁘고 사랑스런 아이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더러는 까칠
하고 성격이나 행동이 모난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을 교사인 나
는 어떻게 하든지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이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입니다. 이
말을 들여다보면 ‘세자세히 보지 않으면 예쁘지 않다’이고 ‘오래 보지 않으면 사랑
스럽지 않다’입니다. 일종의 부정을 바닥에 깔고 있는 긍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도 왜 사람들은 이 시를 선호하고 지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그 무엇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예쁘지 않으며 오래
보지 않으면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스스로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는 반성하게 되었고) 또 이제는 자세히라도 보아서라도 예쁘게 보고 싶고 오래 보
아서라도 사랑스럽게 보고 싶다는 자각 때문에 이 시를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핵심은 시의 후반부 ‘너도 그렇다’에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나만
그렇다’라고 썼다면 이 시는 죽은 시가 됩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나의 시집을 사
주지도 않을 것이며 자주 문학강연에 초청해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우리는
‘나만 그렇다’는 심정과 태도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너도 그

렇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마음입
니다.
코로나 19로 해서 우리는 외출할 때면 어김없이 마스크를 씁니다. 서울지하철을
타보면 삼엄하기까지 한 분위기입니다. 누구도 옆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
든 사람이 마스크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마스크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너를 위한 것이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마스크를 통해서 ‘너도 그
렇다’의 정신을 읽습니다.
우아일체(宇我一體). 우주와 내가 하나란 말입니다. 피아일체(彼我一體). 너와 내
가 다시 하나란 말입니다. 이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떠오르는 때는 없지 싶습니
다. 내가 아프다는 것은 내가 아픈 데서 끝이 나지 않고 우주가 함께 아프다는 것이
고 네가 또한 나와 함께 아프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도 지구가 병들어 힘들어하
는 한 증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풀꽃’ 시로 돌아갑니다. 내가 중시하는 시의 표현법은 반복, 병치, 변용입니
다. 반복이란 같은 단어나 문장을 되풀이하는 것이고 병치란 비슷한 단어나 문장을
나란히 놓는 경우를 말합니다. 1연과 2연이 바로 반복 병치의 표현입니다. 다시 시
를 적어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병치) 보아야(반복)/ 사랑스럽다(병
치)’.
그런가 하면 3연의 ‘너도 그렇다’는 변용의 실례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시에서
는 마지막 부분에 변용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감정의 반전이 일어나고 감동이
증폭더 ᅟᅬᆸ 니다. 더구나 이때의 ‘너’는 풀꽃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입
니다. 1연과 2연의 풀꽃(자연물)이 3연에 와서는 인간인 ‘어’로 바뀐다는 것! 이것
은 의미적 변용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초반부나 중반부도 좋아야 하지만 가장 좋아야 할 부분은 후반
부, 즉 노년기입니다. 노년기에 잘 산 사람이 진정으로 잘 산 사람입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반전이 있는 인생이 정작 좋은 인생입니다. 명예도 젊은 시절의 명예가
아니라 노년기의 명예가 중요합니다. ‘풀꽃’ 시에서 ‘너도 그렇다’그 문장은 내가 쓴
문장이 아닙니다. 나 밖의 누군가가 시켜서 쓴 문장입니다.
나도 어려서 시를 공부할 때는 ‘시의 첫 문장은 시인이 주시는 선물이다’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첫문장을 조촘조촘 따라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
나 나이 들어 나는 그 말에 한 마디를 보탭니다. ‘시의 끝 문장은 신이 주시는 문장
이어야 한다.’ ‘너도 그렇다’ 그 문장은 외람되지만 신이 주시는 문장, 영성이 들어
있는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는 ‘풀꽃’ 시의 형태에 대해서 조금 말하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 이래 나
는 우리나라의 현대시만 읽은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시도 읽고 일본의 하이쿠도 읽

고 시조시도 즐겨 읽어온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암시받은 내용들이 있습니
다. 시는 될수록 짧아야 하고 간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간절하고 곡진해야 한다
는 것. 깊은 마음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
동양 시의 원전은 중국의 한시입니다. 그 중에도 당시(唐詩)입니다. 한시의 기본
은 또 율시보다는 절구에 있습니다. 오언절구(五言絶句)라면 20자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하고 칠언절구(七言絶句)일 때 28자 안에 모든 표현을 마쳐야 합니다. 한
자가 표의문자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놀라운 절약이고 지혜로운 전
략입니다. 그리고 한시의 넉 줄은 자연과 인생의 변화와 흐름을 모방한 것입니다.
이 또한 대단한 발견이며 적용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조는 어떠한가요? 한시의 형식을 따르긴 했지만 그대로를 답습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시의 넉 줄을 세 줄로 줄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시의 기본형식인 기승전결(起承轉結)은 시조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조의 초
장은 그대로 한시의 기(起)이고 중장은 승(承)입니다. 그렇다면 전(轉)과 결(結)은?
여기서 시조의 묘미가 나옵니다. 종장에 전과 결이 함께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
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창안이며 고유함입니다. 멋스러움입니다. 종장의 첫 구인
‘3, 5’ 바로 이 부분이 전(轉)의 역할을 맡고 둘째 구인 ‘4, 3’ 이 부분이 결(結)의 역
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조에서 가장 중하고 쓰기 어려운 부분이 바
로 종장의 첫 구인 ‘3, 5’ 그 부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풀꽃」 시로 돌려봅니다.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풀꽃」
시. 첫 번째 문장(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은 그대로 시조의 초장과 같다고 할 수 있
습니다. 그리고 둘째 문장(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은 또 시조의 중장에 해당합니
다. 이제 마지막 문장이 문제입니다. ‘너도 그렇다.’ 이 다섯 글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습니다. 다섯 글자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너도’가 바로 시조의 종장 첫 구 부
분이 되고 ‘그렇다’는 종장 둘째 구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한시로 본다면 ‘너도’가
전이 되고 ‘그렇다’가 결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풀꽃」 시는 다만 불쑥 솟
아난 글이 아닙니다. 저 중국의 한시로부터 시작하여 시조를 거쳐 오늘에 이른 시
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나는 일본의 하이쿠(俳句)나 와카(和歌)도 공부 삼아 읽은 사람
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본 시의 간결미도 부지불식간에 배워왔을 것입니다. 그러
므로 「풀꽃」 시는 한시와 시조시의 영향뿐만 아니라 일본 시가의 냄새까지가 고
르게 스며 들어간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함께 읽는 글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수하시진(大
同江水何時盡)/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푸르고/ 님 떠나는 남쪽 포구에 이별의 노래 들리네/ 대동강 물
은 언제쯤 마를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을 더할 뿐이네. ― 정지상, 「대동
강」
*산버들 가리고 가려서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
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겨주소서. ― 홍랑 「시조」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퐁당 물소리 ― 마쓰오 바쇼, 「하이쿠」

강의 7
시 쓰기에 대해서

시 쓰기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하거나 쉽게 이해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
다. 시 쓰기에 왕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 쓰기에 앞서 시란 무엇인
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썼는가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를 쓰는 것인가? 나더러 물어도 묘안은 없습니다. 가끔 나는 말하기도
합니다. 외마디 소리 지르듯이 써라. 싸우듯이 써라. 너무 잘 쓸려고 하지 마라. 남
의 눈치를 보지 말라. 당신이 쓰고 싶은 대로 써라. 토해내듯이 써라. 시는 유언과
같은 문장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말은 토해내듯이 쓰라 하는 말입니다. 실상 시의 문장은 가슴
속 깊이로부터 솟구쳐오르는(북받치는) 감정을 쏟아내듯이 쓰는 글입니다. 그러기
에 시는 마음이 급한 것부터 쓰는 글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무질서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 문장의 질서가 사실의 질서라면 시의 질서는 감정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진실과 시의 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시가 사실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감정의 질서를 따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 문장의 기본은 독백이나 대화에 있습니다. 독백은 혼자서 하는 말이고 대화는
둘이서 하는 말입니다. 대화든 독백이든 묻는 말이 있고 대답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작용이고 질서이고 소통이고 리듬입니다. 이것은 또 생명현상이
기도 합니다.
다시 ‘풀꽃’ 시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자세히 보아야(묻는 말)/ 예쁘다(대
답하는 말)// 오래 보아야(묻는 말)/ 사랑스럽다(대답하는 말)// 너도(묻는 말) 그렇

다(대답하는 말). 더 크게 보면 ’너도 그렇다‘는 묻고 답하는 두 사람이 합하는 말이
기도 합니다.
또, 시 표현의 기본은 의인법에 있습니다. 의인법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살아 있
는 대상으로 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천지 만물, 심지어는 추상적인 대
상까지도 살아서 숨 쉬는 인간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인법 안에
비유나 이미지가 모두 수렴됩니다.
시 쓰기를 할 때 가장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시를 사실의 질서로 자꾸만 접근하려
는 데에서 옵니다. 시는 사실의 질서가 아니라 감정의 질서라는 반복적으로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시를 쓸 때 사실을 그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
다. 이른바 묘사법입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듯이 귀에 들리듯이 표현하는 묘사법도 좋은 표현법입니다. 하
지만 시의 문장은 사실 너머의 문장이라는 것을 어떠한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
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는 그렇습니다. 릴케가 체험이라고 말하는 모든 경험을 가
슴 밑바닥에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한동안 그러고 있으면 거기서부터 무슨 감정인가가 피어오릅니다. 그것은 다양합
니다. 색깔일 수도 있고 모양일 수도 있고 향기나 소리나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 나는 조심스럽게 언어로 바꿉니다. 그럴 때 그 원형으로서의 감정이 변질되지
않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시의 원형을 뱀이거나 휘발유거나 옷 벗은 여인과 같
습니다.
뱀이거나 휘발유일 때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재빨
리 붙잡는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옷 벗은 여인일 때 시인은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하
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옷 벗은 여인은 부끄러워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기
에 그 여인의 몸에 맞는 옷을 입혀주는 친절을 아끼지 말아야 하빈다.
시의 일차적 재료는 시인의 인생입니다. 그의 날마다의 삶과 그가 만나는 사람과
그가 겪는 사건과 그가 대하는 자연물입니다. 시인은 이 일차적인 재료를 마음의
착즙기에 넣고 누르거나 으깨어서 즙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입니
다.
시는 물리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화학적 변화를 요구합니다. 김치를 두고 말할
때, 시는 겉절이 김치가 아니라 잘 익은 김장김치에 해당합니다. 하나의 발효상태
입니다. 당초의 질료가 완전히 변하여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된 상태입니다. 그것은
쌀과 누룩과 물을 재료 삼아 만든 술과도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함께 읽는 시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 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 백석, 「주막(酒幕)」

*붕어곰 : 붕어를 알맞게 지지거나 구운 것/ *질들은 : 오래 사용하여 반들반들한/ *팔모알
상 : 테두리가 팔각으로 만들어진 개다리소반/ *장고기 : 잔고기. 조그마한 물고기/ *울파
주 : 대. 수수깡. 싸리. 갈대 등을 엮어 놓은 울타리/ *엄지 : 짐승의 어미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
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리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
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
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女僧)」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금덤판 : 금광의 일터, 금전판/ *파리한 : 몸이 몹시 여위거나 핏
기가 없고 해쓱한
*섶벌 : 재래종의 꿀벌/ *마당귀 : 마당의 한 귀퉁이/ *머리 오리 :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
    • 글자 크기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 PPT (by 강화식) LA 미주한국문인협회 웹사이트에 올린 여름문학 축제 포스터 (by 강화식)

댓글 달기

댓글 3
  • 2022.8.4 13:18 댓글추천 0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2022.8.4 14:15 댓글추천 0

    새벽, 설핏 잠이 깨어 누워 있다가 배가 고파져 부스스 한채

    냉장고 문을 연다

    요구르트 한병 꺼내어 허기 달래고

    노트 펼치어 끄적이다 만 글귀에 매달려 보지만 진척이 없어

    물 한잔 따라 마시곤 

    바람 불러들일 요량으로 바깥마당에 연해있는 문을 연다

    새벽 매미가  바람 일으키며 울고있다


    궁금하여 애문방에 들러보니

    연선님이 올려준 나태주 시인님의 강의가 나를 깨운다

    잠 안 온다고 ,배 고팠다고 푸념했던  내 알량함이

    이리도 고마울 수가 없다

    새벽 공부로 포만감을 가~득 채우고선  두분께 감사하는 내가 어여뻐진다

  • 이난순님께
    2022.8.5 15:36 댓글추천 0

    유트브에서 강의를 듣다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글로 옮겨 주시니 완전히 내것을 만든 것 같은 

    포만감이 듭니다.

    수고의 덕분 입니다.

    감사 합니다.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