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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 CBS 제1기 성우, TBC 제1기 성우
- 1996년 수필공원 초회추천
- 대한민국 연극제 여우주연상, 동아일보 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상 여우주연상 수상
- 연극, TV, 영화 연기자 협회 회원,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송수정 나의 할머니 /김복희 (문학회 6월 숙제 2편)글을 조금 줄였다

왕자2017.06.19 18:21조회 수 9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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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정 나의 할머니! / 김복희

어려서 나의 할머니 성함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와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는 아들만 셋 두셨고 나는 큰아들의 맏딸이니 할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으며 자랐는지 집안 내는 물론 내 고향에서는 소문난 손녀딸이었다. 할머니 방에서 키웠졌으며 며느리는 젖을 먹일 때만 애기를 보았다. 눈 마주치면 정든다며 저고리 앞섶을 들어 애기 얼굴을 가리고 젖을 먹게 하여서 앞섶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하였다. 지독한 시집살이를 한 엄마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할머니가 좋았다.

해방 후 소련군이 이북에 들어오자 아버지 엄마와 동생 둘 은 38선 넘어 서울로 피난을 보내고 나는 할머니가 보내지 않아서 부모님과 생이별로 반년 이상을 지냈다. 할머니 앞에선 엄마 아버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할머니가 섭섭해 하실까봐 ..

그렇지만 매일 밤 이불속에서 울었다. 어느 날은 결심을 하고 잠꼬대를 하는 척 연기를 하였다 “엄마 ~ 엄마 ~” 정말로 울며 엄마를 불렀다. 아무 말 않던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니 벽장에서 꿀을 한 숫 갈을 퍼서 내 입에 넣어주셨다.

할머니는 몸집이 작은 개성분 이며 소문난 살림꾼이셨다. 음식을 잘 만드시고 찬실에 작은 방석을 깔고 앉아서 떡이며 다식이며 경단이며 정성스레 만드시었다. 엄마는 찬실에 걸터앉지도 못하고 심부름만 하는 것을 보았다

서울서 자란 엄마를 게으르다고 남에게 흉보고 다니신 것도 들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삼방’ 약수터에 가셔서 여러 날 계시면 콧노래를 부르며 명랑하다가도 할머니가 집에 오시는 날은 아침부터 불안 해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 엄마. 작은 아버지 모두 할머니를 어려워하였는데 작은 엄마는 할머니에게 대 들어서 할머니가 꼼짝 못하셨다고 들었다. 작은 엄마는 신여성이었다. 처녀 때 사진을 보니 모자를 쓴 멋쟁이며 흰 뾰족 구두를 신고 있어서 참 자랑스러웠다.

춘천 농고를 나온 작은 아버지는 평강 군청에 다녀서 이남으로 못 오고 공산 치하에 남게 되었다. 위장 공산당원으로 무조건 “옳소 옳소” 한다고 서울까지 “옳소 아저씨”라는 소문이 들렸다.

털이 많고 골방에서 바이요린 연주를 잘 하셨었다.

잠꼬대 사건 이후 할머니는 안내원을 물색해서 나를 서울로 보내기 까지 내 앞에서 자주 우셨다.

안내원을 따라 기차를 타고 가서 38선 부근 어느 집에 숨어 있다가 새벽에 산을 넘고 임진강을 건넜다. 뒤에서 들리는 따발총소리는 소련군이라며 숨소리도 못 내게 하였다. 너무 무서웠다. 안내원 아저씨의 무등을(목마) 타고 아저씨 이마를 꽉 잡고 강을 건너 이남땅에 내려놓으니 먼동이 트였다. 젖은 운동화에 작은 자갈들이 달라붙었다. 오월로 기억하는데 신발이 얼었었나 그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서울행 기차를 타러 걸어가는데 왼쪽 얕은 등성이에 철쭉인지 진달래인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아저씨에게 꽃을 꺾어 달라고 졸라서 한웅큼의 꽃을 안고 전곡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오며 한강 철교를 건넜다.

이상한 것은 철교가 어느 다리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청량리를 지나 낭간으로 나와 철교위에서 가슴에 붙인 4학년 반장 빨간 명찰을 떼어 한강에 던졌다. “이제 나는 이남 사람이다 ~”

평생 기억에 남기려고 폼 잡고서 ..... 해방 다음 해니 (1946년)

강원도 평강 인민학교 4학년 11살 이었다.

아버지가 용산역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신다.

고향에서는 미남인 아버지였는데 서울에서의 피난민 모습은 수염이 좀 지저분하게 보여서 어린 맘에 좀 서글펐다.

꽃이 거의 떨어진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꽃을 받는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며 나는 돌아서서 손등으로 눈물을 흠쳤다.

이듬 해 송수정 나의 할머니는 재산정리를 하시고 안내원을 따라 남한으로 오셨다 . 작은아버지 식구들만 남겨놓고 .. 유치원부터 같이 다니던 한 살 아래 사촌 동생 경태가 보고 싶어 또 그리움을 삼키며 살았다. 눈알이 노랗다고 로스게(소련군?) 라는 별명을 갖었었다.

경태는 원산 보건소에서 의사로 지낸다고 20여 년 전 중국을 통해 바람결에 들었다. 어려서 헤어진 사촌 동생이지만 서울서 적십지사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해놓고 있었다.

할머니는 60대에 B 29 비행기 소리가 귀에서 난다고 하시며 청각을 잃어가셨다 보청기도 몰랐던 시절이어서 이제 생각하면 가슴이 싸 ㅡ 해지며 할머니가 불쌍하고 죄스러워진다. 할머니는 증손자가 중학생 때 운명하셨으니 장수하셨다. 내가 노역연기를 할 때면 할머니를 상상하며 연기를 하였었다. 어버이  날이면 부모님보다 할머니가 더 그리워진다. 아직도 나는 할머니 냄새를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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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럴까? /김복희 송수정 나의 할머니 /김복희 (문학회 6월 숙제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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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파란만장한 삶이셨네요.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마치 제가 만난적이 있는 분인양 착각이 드네요.


    수정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은 복희 선배님도

    사랑이 넘치신 분이세요.

  • 왕자글쓴이
    2017.6.19 19:51 댓글추천 0비추천 0

    요즘도 할머니 꿈을 꿉니다.


    유난한 사랑을 받았어요 


    중학교때는 매일 점심시간에  따뜻한 도시락을 손수 갖어오셨지요


    버스도 안타시고 왕복걸어서 ...


    현재 나보다 훨신 젊은 할머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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