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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 CBS 제1기 성우, TBC 제1기 성우
- 1996년 수필공원 초회추천
- 대한민국 연극제 여우주연상, 동아일보 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상 여우주연상 수상
- 연극, TV, 영화 연기자 협회 회원,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아틀란타에 와서

왕자2015.03.08 16:45조회 수 10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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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란타에 와서

5년 전 여름 ‘남은여생을 보내고 나면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리라’

생각하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애틀란타는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삭막한 빌딩 숲 같은 서울을 벗어나 결국 평생을 마음속에 그리던 자연 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은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여중 2학년 때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살아지다’ 를 읽고 난 후 스칼렛 오하라의 매혹적인 매력을 흉내 내고 싶었고 그녀처럼 강한 여성이 되고도 싶었다.

아! 바로 그 땅 애틀란타는 소녀 시절 꿈꿔왔던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면서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맑은 날 이곳의 하늘을 바라볼 때면 늘 마가렛 미첼소녀가 바라본 하늘빛과 표정은 어떤 것 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강원도 이북 평강에서 태어나 열 살에 8.15 해방을 맞으며 가족과 함께 서울에 정착해 살다가 지난 2005년 여름 이곳으로 오기까지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간혹 야외촬영이 있어 시골로 갈 기회가 생기면 촬영 보다 맑은 공기와 푸른 숲과 시골의 정취가 너무 좋아 혼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는 ‘더 나이 들면 꼭 시골에서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나면 시골 특유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꿈은 꿈으로만 끝나고 마는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이민 전 방문하게 된 아틀란타는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과는 달리 한적하면서도 불편함이 없는 그야말로 내가 그리던 그런 아름다운 곳 이었다. 이곳으로 결국 이민 온 후 첫해는 도라빌 역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마르타 지하철을 이용해 다운타운의 이곳저곳을 꽤 돌아다녔다. 길을 가다가 한국 분들을 만나면 화면에서 보던 사람이라고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기뻤고 드라마에 쫓기던 생활에서 시간적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마냥 행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 생활은 어디나 바삐 일을 해야 사는 곳이고 애틀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편과 혹은 혼자서 여행도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엇인가 내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여행은 잠시의 휴식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결국 우리의 일상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접을 수 는 없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연극이라는 막중한 과업같은것이 있고 어찌 보면 평생을 바쳐 일 해온 연극은 생명 같은 것이기도 했다. 마침 애틀란타 연극협회 주최로 다음해인 2006년 ‘울고넘는 박달재 ’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2007년에는 이윤택 작 연극‘어머니 공연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고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비록 늦게 시작한 애틀란타의 생활이지만 내가 해 오던 일을 계속하면서 애틀란타에 계신 한인들을 위한 문화 향상에 조금이라도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도 느끼고 이곳 생활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다. 날로 변하는 이곳의 한인 이민 사회는 늦게 이민 온 나를 외롭게도 후회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아직은 한국에서 사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눈을 뜨면 한국사람 속에 내가 있고 우리말 을 하며 살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사철 푸른 숲이 우거진 넓은 길을 혼자 운전을 하노라면 여기가 설악산인가 금강산인가 하며 콧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내 뼈를 묻힐 애틀란타.

지난 9월15일 나는 남편과 함께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동안 ESL 학교도 다니고 나름대로 대사 외우듯이 영어공부도 열심히 해 왔다.

시민권 선서식에서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내 조국을 버리고 미국 시민으로 선서식을 하고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고국에서도 모범 국민으로 살았다. 이제 자식들이 있는 이 땅에서도 모범적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 할 것이다. 애틀란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은 토요일이면 한국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독교 방송(CBS)국에서

방송진행도하며 여성문학회의 모임에 나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서울에서 보다 더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나는 이제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내 고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며 기후좋은 이곳에서 내 고국의 동포들과 보람 있는 삶을 위해서 계속 노력하겠다. 이른 아침 창문을 열고 어느새 선선해진 공기를 맘 것 마시면서 오늘도 크게 기지개를 펴 본다. (애틀란타 한인회보 10월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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