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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 CBS 제1기 성우, TBC 제1기 성우
- 1996년 수필공원 초회추천
- 대한민국 연극제 여우주연상, 동아일보 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상 여우주연상 수상
- 연극, TV, 영화 연기자 협회 회원,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그날부터 우리는 한 식구가 되었다

왕자2015.02.28 20:57조회 수 6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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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우리는 한 식구가 되었다

우리 집 안방에는 한번 도 뵌 적이 없는 시어머니의 사진이 걸려있다

조그만 흑백사진을 확대한 것이어서 어느 집 빈소에 걸려 있는 사진처럼

생기가 없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수심에 잠긴 표정은 방안 분위기까지 우울하게 만든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가끔 이 사진을 들여다본다.

또 때로는 돋보기까지 끼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모자간이니 당연한 일인데도 남편의 얼굴과 비슷한 것이 여간 신기하지가 않다

시어머님은 생이별한 남편과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스물하고도 세 해 동안을 애를 태우며

사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그런 시어머님을 생각할 때 마다 같은 여지로서 가슴이 오그라드는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시댁은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었지만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는 평양에서 살고 계셨다고 한다.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 하게 되자 시아버지께서는 몰수당했던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농장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셨는데 그 이튿날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갑자기 후퇴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 있던 큰아들인 내 남편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하 하는 피난 대열 속에 끼어서

종일 눈보라 속을 걸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북쪽에서 트럭 한대가 나려오는 것을 보고 무조건 차를 세웠다고 한다. 그 트럭은 평양 치안대원과 그 가족들을 태운 차였다 남편은 다급한 나머지 비상용으로 갖고 있던 어머니의 금반지를 책임자에게 건네주며 애원을 했다

몸이 허약한 어머니만이라도 태워 달라고. 책임자는 마지못한 듯이 어머니를 타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타지 않겠다고 버티셨다 사실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를 억지로 태우면서 외치듯이 말했다 “어머니가 먼저 서울로 가셔야 농장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나올 수 있어요“ 트럭은 급히 출발하였다 어둠이 깔린 속에서 아들은 멀어져 가는 어머니가 서울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빌면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뒤 쫓아 갔다.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셨다.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결혼 초 가끔 자다가 일어나 울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맞바꾸었다고 마음 아파할 때가 있었다. 이런 남편의 아픈 마음은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 있었다.

그동안 이산가족 찾기는 물론 이북 5도청 통일원 적십자사 할 것 없이 소식을 알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고향 후배인 재미교포 K씨가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알게 되어 즉시 그 분께 편지와 전화로 북한의 어머니와 누님 그리고 부부교사였던 동생의 이름과 옛날 주소를 자세히 전해주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후에 미국 K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동생부부가 현재 량강도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며 주소까지 보내왔다. 남편은 며칠 밤 울며 편지를 썼다. 서울 주소로 편지를 할 수가 없어 미국 유학중인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북한으로 보냈다. 그해 가을 아들 학위 수여식에 참석 차 우리 부부가 미국에 도착하니 북한에서 넉 달 만에 편지가 도착 해 있었다. 문학소녀였다던 시누이의 편지는 오빠를 부르며 구구절절 어찌나 애통하게

편지를 썼던지 마분지 같은 노트에 눈물자국이 범벅이었다.

생사조차 모르고 40년을 살아온 남편이 이 편지를 받고 기쁨이야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애타던 어머니의 소식이 그 안에 있었다.

트럭에서 피난민들의 아우성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아들 뒤를 따라 농장으로 갔으나 가족이 모두 떠난 뒤였다. 조용해지면 돌아오겠지 하고 평양 딸네 집으로 가셨다고한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남쪽을 향해 기도드리시다가 남편과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1973년 가을 74세 로 운명을 하셨다고한다.

양단 저고리를 입고 찍은 어머니의 상반신 사진이 들어있었다. 백발의 아들은 사진을 가슴에 묻고 한없이 통곡을 하였다.

어느 날 퇴근하여 들어온 남편이 큰 액자를 들고 왔다. 남편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죄를 용서받을 길은 없지만 오늘부터 우리가 어머니를 모시는 마음으로 이 사진을 안방에 걸어야겠어요.”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아무소리도 못 내고

고개를 돌린 채 끄덕였다. 그러면서 남편의 아픈 마음을 내 마음에 담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한 식구가 되었다.

*현재 이민을 와서도 침실에 어머니사진을 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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