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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석 창작글방


김평석
- 시인
- 노스 캐롤라이나주 샬롯 거주
- 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 문학의강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여행 중에도

2015.08.15 12:04

peter 조회 수:243

여행 중에도 함께하신 하나님

인생에 있어서 긴 겨울과 무더운 여름, 봄과 가을은 언제쯤 그리고 얼마만큼 몇 번이나 오고 가는 것 일까? 그리고 그 봄은 얼마나 많은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 내는 것 일까? 그리해 몇 번의 추수의 계절을 만나고 열매를 매달아 풍족히 먹고 나누기도 하는 것 일까? 그러기 위해 긴 수면의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꽃과 여름의 열매로 익어 가야 하는 것 일까? 올 때는 순서 따라왔지만 갈 때는 언제일지 모르는 우리는 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 그대로 선연한 붉은 빛을 토하며 이제 마지막 남은 잎새 마져 떨어져 땅에 뒹구는 낙엽은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날 들을 어쩔 수 없이 뒤 돌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리워하게도 한다. 거의 30년, 강산이 세 번 씩이나 변한 세월, 청년의 나이에 떠나온 고향, 검은 머리가 변하여 거의 반백의 노 중년의 나이에 만사를 제쳐두고 아내와 함께,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며 한 달간 고국 방문 여행길에 올랐다. 하루하루 복잡한 인생살이 에 뒤엉켜 진정 중요한 일과 단순한 기쁨을 얼마나 자주 간과 하며 살았던가?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 많은 날 들 중 하나에도 조물주께서 주신 놀라운 선물의 웅대함, 기쁨의 순간을 짬을 내어 경험 하지도,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고국 여행을 그렇게도 원하던 아내의 소원 한번 못 들어준 못남이 더없이 한심스러웠다. 욥의 칠 배의 복을 우리도 밭지 않았던가! 아니 더 많고 많은 복을 선물로 밭지 않았던가! 이제는 아이 들이 더 철이 들어 다녀오라며 등 떠밀어 떠난 행복한 여행이 되었다. 긴 비행시간 에도 아내는 조금도 피곤치 않다고 했다. 나 역시 오히려 가뿐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드디어 그리운 고국의 품에 안겼다. 마치 조각처럼 지어진 대형 공항의 압권과 시원히 뚫린 공항대로는 대국의 어디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작아도 못살아도 좋다, 가난해도 좋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 늘 포근한 어머니 품 과도 같은 곳, 그 어머니 는 떠났어도 그곳에 늘 계시는 듯 내게는 포근한 미소로 다정한 행복의 미소 로 반겨주는 고향이 있기에 그러 하다. 살아있는 많은 것 들이 소멸로 향해 가는 지금도 고향을 담으니 삶의 의지와 기운이 돋아난다. 미움이나 사랑에 안달 하고 너무 바삐 살아 왔다는 한탄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그래 중요 한 것은 지금이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인 것이다. 그리웠다, 보고 십고 만나고 싶었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사람들의 체취, 별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느낌이 좋기만 한 사람들, 법 없이도 살아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겨운 이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더하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그들은 늙지 않았다. 마냥 어린아이 같이 반긴다. 손 과손 마주 잡고, 어깨 부비며 정을 나누고,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운다. 무슨 의식 이라 도 치루는 양 그들을 뒤로 하고 정겨운 논두렁 밭두렁 가로 수 코스모스 길, 뒷동산 오솔 길 조약돌 하나에도 의미 깊이 새기며 눈에 넣고 가슴에 퍼 담기에 시간은 너무도 짧기만 하구나. 덕분에 좋은 친구가 뭔지를 생각나게 했고 실지로 만나기도 하였다. 이 아름다운 사람 들이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고 있음을 확인 하면서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쉰다는 것 에 대해 크게 감사 하는 마음의문이 열렸음을 고마워한다. 그래 이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흘러 왔지, 앞 의로 의 십년 세월 이십년 세월 후에도 나는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저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들 있을까? 내영역의 좁은 울에서 나와 전혀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다. 이렇게 펼쳐진 세상에서 어린 아이처럼 천진한 몸짓,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이 행복한 웃음의 때가 또 다른 추억이 되겠지? 기뻐하며 내 일상의 틀에서 빠져나온 누에처럼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안식은 일상생활 에 활력을 가져다준다, 힘과 기쁨을 준다. 우리 부부가 머문 처갓집은 그 역사가 100년 된 시흥

장로교회가 있는 동네에 있었다. 그래서 첫 주일은 이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 나고 인사 하는 중에 같은 NC 랄리 에서 담임 목사로 부임해 오셨다는 방수성 목사님을 만나 반가 왔었다. 나는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에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시흥 초등학교 교정을 찾아 아이들이 등교 하기전의 조용한 운동장을 몇 바퀴 돈후에 운동장주위 화단에 온갖 요염한 자태로 피어난 가을꽃을 맘껏 감상 하고 만져도 보고 씨앗 도 체취해서 숙소로 돌아오곤 하였다. 가을꽃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모스, 눈이 시리도록 빨간색을 내뿜던 맨드라미, 그리고 각종 이름 모를 꽃들, 나무들, 하나님은 어찌 이리 섬세한 부분까지도 있게 하셨을까? 어머니 품 같은 그 조국으로 돌아와 노 중년의 늙 수구레 한 모습을 하고 바라보는 모든 것은 내게 더욱 새로움과, 신기함과, 행복함으로 다가왔다. 짧은 고국 여행 중 시간을 또 쪼개어 조카가 살고 있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 다녀왔다. 청년의 때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 삼국지의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 유비의 촉한, 양자강 상 하류, 그리고 중원을 그 기반으로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벌리 며 용맹 떨쳐 말을 달렸던 곳. 그 후 천하를 통일한 진시 황제의 진나라로부터 지금의 중화인민 공화국, 모택동이 혁명으로 세운 지금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땅에 오게 된 것이다. 먼저 온통 붉은색의 천안문 광장을 보며 아직도 철의장막 공산주의 이념으로 잔뜩 무장한 무시무시함이 온몸을 전율하게 하였다. 수많은 관광 인파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문을 지났나 싶으면 문이 나오고 또 문이 나오고 또 문이 나오던 거대한 궁전의위용 임금의 여름 별장 이였다던 이화원, 황제의 정원 경산공원,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공화국의 민족 박물관, 짧은 5일간의 여행 이었지만 참 볼거리가 많은 나라, 선조들의 피땀 어린 유산으로 관광 수입을 대대적으로 얻는 나라란 실감을 할 수 있었다. 하루의 시간을 따로 때어내어 이번에는 북경에서 4~50분 떨어진 산을 올랐다. 만리장

성을 보기 위함이다. 수려한 산새와 시를 쓰듯 쌓은 성곽을 보면서 역시 시의나라답다 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리장성을 보기 전에는 상식이 없어 단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쪽서 저쪽까지 일자로 그어놓은 돌선 에 불과 하리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일자도 지렁이란 표현도 아닌 S 자요. V자요 W자인 것 이다.들쭉날쭉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가 녹색 도화지에 연필로 아무렇게나 제 좋은데 로 선을 그어 놓은 것 같았다. 이런 거대한 역사를 보지 못할뻔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은혜를 한없이 감사드리고, 조카에게도 감사하다. 은유적, 명상적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듯한 만리장성, 그도 그럴 것이 그 많은 돌덩이 들을 옮길만한 기계 장비도 없던 시절에 순전히 사람의 노동으로 평지도 아닌 산에 어떻게 만리에 걸처 이런 거대한 공사를 할 수 있었을까? 저들의 노고와 업적 그리고 많은 희생을 보는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가 오른 지역에서는 유난히도 한국에서 온 단체 관광 팀 이 많았다. 그래서 인지 안내하는 중국인의입에서 연신 빨리 빨리란 특별 단어가 여기 저기 서 솥아 져 나오곤 했었다. 다음날은 마침 주일을 맞아 호텔을 빌려 예배드리는 twenty one century church에서 예배를 드렸다. 주보만 인쇄하지 않은 것 외에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배드리는 것 같지 않게 자유로운 예배를 드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올림픽 main stadium 과 upton 을 둘러보았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북경 시내가 온통 가난한 서민 들 의 판자촌으로 가득 했다는데 이제는 APT building 숲으로 가득하고 시내중심가 요지에 는 한국의 금호니, 현대니 하는 대형사들의 거대한 빌딩들로 인해 제2의 한국 서울을 보는 듯 도리어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5일 간의 일정표에는 그 유명한 중국 가극 관람 시간이 있었다. 조카의 배려를 무시하고 내가 빼자고 하였다. TV 를 켜기

만하면 한 두어 체널 정도 에서는 아직도 인기리에 공연되어 방영 되는 전통 가극을 수시로 볼 수 있기 때문 이었다. 이번에 중국의 4대 고전악기로, 비파, 양금, 구정, 아쟁 중 양금연주를 처조카의연주로 live 로 들을 수 있었고 4대 음식인 북경 요리(오리전문), 사천성 요리(매운게 특징), 남방요리(해물전문), 광동 요리를 실 컨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루저녁에 는 북한당국이 직접 중국 여러 도시에서 열고 있다는 "평양옥류관" 식당에서 저녁7:30분부터 시작 하는 공연을 보면서 식사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공연 전에는 테이블을 돌며 service 하던 종업원이 금세 옷을 갈아입고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 각서비스 담당 테이블 손님들이 꽃을 사서 안기는 순서 까지가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한 자본주의 방식을 한발 앞서고 있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그랬다. 물 빼고는 김치 종류 하나까지도 값을 매겨 파는 외에는 같은 동포요 형제요, 자매였다. 돌아가면 북한의 형제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리라 다짐했다. 그랬다, 다시중국을 와볼 것 같지 않아 작은 것 하나에 도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보고 또 보았다. 중국을 와서 직접 보기 전 에는 기름기 많고 배가 불룩 나온 중국인을 늘 연상 하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그들은 작은 키에 정이 한없이 많은 민족 이었다. 인류 중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을

맨 처음으로 만들어낸 지혜로운 민족이라 들었다. 힘을 지닌 사람들, 대국이 될 땅과 문화유산을 상속 밭은 사람들, 머지않아 PAX sinica 는 진정 이루어 지리라는 부러움이 있었다. 다만 아직도 어두움을 드리우고 있는 부분까지도 빛으로 가득 채워지기 위해 저들도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고 안분자족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살아주길 중국을 떠나며 기도 드렸다. 고국이던 중국 이던 여행이란 이리도 좋은 것이로구나. 그렇게 밝은 미소로 늘 아름답던 아내가 고혈압 판정과 이로 인한 약간의 갱년기 우울증으로 그동안 웃음을 놓고 있던 아내의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삶의 행복을 느낀다. 그래, 무엇보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순간 들을 더욱 자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그래, 형식이나 기교가 아닌 순수한 내 호흡이 빗어 내는 삶의 노래를 끝없이 부르리라. 이제는 나그네 삶에서 덧없이 사라질 부, 명예 권세, 쾌락을 추구 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리라. spurgeon 이라는 유명한 강사는 말 했었지,"촛불을 보고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요, 달빛을 보고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햇빛을 주실 것이요. 햇빛을 보고 감사 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일곱 날의 빛을 주실 것이다“ 라 고, 중국에서 돌아와 짐을 풀자마자 곧 이번에는 일박이일 일정으로 부산 여행을 떠났다. 이물 없이 지낸 동무 몇과 젊었던 때의 추억이 베인 곳들을 돌아보고 만나기 위해 두 시간 반 남짓 KTX 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동무들과 파도 소리가 들리고 갯내 음이 물신 풍기는 태종대 언덕 횟집에서 먹는 생선회 맛은 일품 이었다. 저녁에는 찻집으로 노래방으로 몰려가 나도 그들과 하나 되어 나그네 설움, 갈대의 순정을 목이 메어라 불러 제겼다. 그 외 아 는 노래가 없어 다만 추억만을 먹고 있었다. 4~50년 전 초등학교 친구들이니 더욱 이시간이 귀하기만 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내가 어렸을 적에는 태종대 낙화암 까지 걸어 들어가서 바다 끝 전망대에서 오륙도 도 바라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곳 동백섬에

"APEC" 정상들의 정상회담장 건물을 그대로 비워두고 관리만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산을 방문 했을 때는 보슬비가 내리는 중에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리고 있었고,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을 잇는 6차선 남항대교 상량식이 있던 때였었다. 다음날은 용두산 공원을 올랐다. 30년 세월에도 탑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의 청년은 변하여 중늙은이 가 되어 이곳에 다시 서니 감회가 새로 왔다. 바삐 몇 곳을 더 둘러보려 속도를 내어 하루에 한 번씩 들어 올렸던 영도다리도 가 보았다. 지금은 들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서있기만 하였다. 광안리해수욕장 에는 광안리 대교가 이층으로 건축 되어져 있어 마치 해수욕장 에서 보면 일곱 빛깔 무지개를 보는 듯 바다 한가운데를 포물선을 그리며 서있고, 대교가 끝

나는 지점에는 88 올림픽 때 요트 경기장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 많은 boat 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었다. 아! 바다! 이 바다는 언제나 나를 미치게 했었다. 오늘 와 다시 서는 이 바다에서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내 곁에 있어 파도와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한없이 행복해 하고 있다. 너무 너무 행복하다. 너무나도 행복 했었다. 짧은 시간의 아시 움 을 뒤로 한 체 다시 서울로 돌아와 아까운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감싸 안기 위해 한강을 보러 나섰다. 끝없이 펼 처진 강의 야경을 보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뿌듯함에 나도 젖어 보았다. 지하철도 타보았다. 지난 세월 섬유, 봉제, 가발 등 경공업 근로자로 밤 낯없이 일해 시골동생들 학비 벌어 보내던 한강의 기적을 이룬 일등 공신들의 현주소였던 구로공단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의 구로 공단은 사라져 없어지고 지금은 정보, 통신, 공구, 벤처 기업들이 들어서고 지하철이름도 구로공단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더욱 실감이 난다. 경기도에 사는 동생네 집을 방문 하면서 는 악취가 진동 하던 시화호, 서북쪽은 시화 신도시 가 들어서 고 인천시 남동구 와 시흥시 논곡동 을 잇는 제3경인 고속 도로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일산의 신도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면서 유명해져 있어, 명성 그대로 높은 APT 빌딩 숲으로 가득 했었다. 곳곳 마다 가는 곳 마다 깨끗하고 높은 빌딩들로 가득 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조국이 더없이 자랑 서러웠었다. 판문점에서 는 점만 경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니 들녘에 드문드문 사람의 움직임이 포착 될 뿐 텅 빈 시커먼 건물들 만 바라보는 나의 가슴도 뻥 뚫려 있었다. 이 서러운 분단만 아니 라면 저 북한 들녘의 농부와 우리들은 서로 왔다 갔다 할 바로 지천인 것이다 하루 속히 통일 의 그날이 와 저 평화로운 들녘에서 서로 부등 켜 안고 기뻐 뛰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밭은 이 땅의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사랑받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 예외 일수는 없기 때문 이다. 생각이 난다, 고향은 역시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임을 새삼 더 느끼게 한다. 산천초목은 변했어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내 마음에 그대로인 고향, 1980년에 이민을 떠나와 첫 해와 이듬해 그리고 몇 수년 더 보고 십고 그리워 다시 돌아가고 싶어 안달하던 고향, 그리운 마음에 고향을 가사로 담아내어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렀던 그 사무치던 고향, 스치는 풍경 하나하나, 동무들과 뛰놀던 옛 동산, 골목길, 금문교를 본 따 지었다는 대교, 어느 것 하나 아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날은 겁이 많은 아내를 이른 새벽에 깨워 오직 둘만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다리를 손을 잡고 걸어 왕복하며 다리에 스치는 세찬 바람 소리에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어도 둘은 재잘대며, 바람에 날릴 것 같은 가냘 펀 몸을 의지해오는 아내와 하나 되어 밤바다와 바람과 철교, 고향의정을 함께 마셨던 그 새벽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인적 하나 없던 한국의 금문교는 우리 둘 만의 다리가 되어 앞으로 살아갈 우리만의 시간 동안 우리 앞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 하리라. 더불어 영원 하라 고향이여, 축복 있어라 아름다운 이들이여!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고 한없이 행복했던 그 여행이 며칠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거리에는 어느 듯 바람에 낙엽이 뒹굴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민둥이 나무들로 내 마음 까지 허무에 젖게 하는 계절 을 만났다. 그러나 어김없이 이 겨울에도 성탄은 오고, 새날은 밝으리라.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르고 오늘은 또 내일이 되어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과거로의 유수로 흘러가겠구나. 그래 이제 새날이 밝아온다. 새날의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매화가 제일먼저 꽃을 피울 것이다. 다음으로 산수유와 벚꽃 진달래 가 지천으로 피면, 우리 인생도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한낱 들풀도 새날에는 새 꽃을 피우지 않는가! 하물며 사람임에야, 그리운 고향산천, 아름다운 이들이여, 우리 또다시 만나자. 기회만 있

다면 만나고 또다시 만나자 조금 이라도 그리고 한발 앞서 양보 하고,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자.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이 축복으로 절망이 소망의 꽃으로 피어나는 우리 모두의 새해가 되기를, 여행 중에도 함께하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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